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구원 등판한 승리 투수로 남든, 영원한 패잔병의 길로 접어들든 양자택일만 남았다. 갈림길에 선 이는 미래통합당 원톱인 김종인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이다. 열세인 4·15 총선을 뒤집으면 다음 길은 ‘차기 대권 프로젝트’ 가동이다. 뒤집지 못하면, 사실상 정계 은퇴 수순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4월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긴급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가능성은 반반이다. 통합당 복수 인사들은 ‘김종인 영입’에 대해 “일단은 합격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 위원장의 짧고 굵은 메시지로 이슈 시선 돌리기를 했다고 자평했다. 김 위원장은 통합당 원톱을 맡은 직후 “코로나 비상재원 100조 원 확보”, “모든 질서가 파괴된 3년”, “경기 상황, 깡통 찰 지경”, “실업주도몰락” 등의 발언으로 이슈파이팅을 전개했다.
이진복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4월 초 “수도권에서 김종인 효과를 보고 있다”며 “2∼3%포인트 차의 초접전 지역이 50곳”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적어도 여당의 원사이드 게임을 막는 지지대 역할은 했다는 얘기다. 앞서 공천 내홍에 휩싸였던 황교안 대표가 자택까지 찾아가 김 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이유도 ‘중도층 외연 확장’ 전략과 무관치 않다.
당 내부에서도 ‘김종인 마법’을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은 ‘선거의 달인’으로 통한다. ‘박근혜 vs 문재인’의 구도였던 2012년 19대 총선과 2016년 20대 총선을 각각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19대 총선 땐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에, 그다음 총선 땐 진보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에 각각 몸을 담았다. 상대 진영을 넘나드는 카멜레온 행보에도 2000년 이후 최대 접전 구도였던 두 차례의 총선을 모두 이겼다.
여권 한 관계자는 “김종인 파워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옛 동지를 공격할 때 나온다”며 “과거의 동지가 공격하는 것도 당하는 입장에선 내부 분열”이라고 말했다.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 때 경제민주화(제119조 2항) 조항을 주도한 김 위원장은 19대 대선 때 새누리당으로 들어가 경제민주화 기치를 들고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20대 총선에선 민주당에 입당, 다시 새누리당을 공격했다. 4년 뒤에는 다시 통합당에 몸담고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다.
문제는 ‘이번에도 통할까’다. 결론은 물음표다. 앞서 그는 두 차례의 총선에서 각각 당 전권을 위임받으면서 ‘여의도 차르’로 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 합류 시점이 늦었다. 김 위원장이 황 대표 제안을 수락한 것은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둔 3월 26일이다.
19∼20대 총선 때 새누리당과 민주당에서 보여줬던 김종인식 정책도 공천 장악력도 선보이지 못했다. 여의도 일각에서 김종인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더구나 ‘김대호·차명진’ 막말 파동은 김종인 효과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김 위원장이 난파에 처한 통합당을 구하지 못할 경우 선택지는 정계은퇴 수순, 단 하나밖에 없다. 1940년생인 김 위원장은 올해 여든이다.
반대로 김 위원장이 9회 말 투아웃에서 홈런을 친다면, 그다음 플랜은 대권 프로젝트 가동이다. 황 대표가 김 위원장을 영입할 때부터 당 안팎에선 ‘당권 김종인·대권 황교안’ 역할 분담론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권교체를 위한 ‘킹 메이커’ 역할론이 핵심이다. 다만 보수진영 내부 역학구도에 따라 김 위원장이 직접 킹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