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끈 매물은 현대HCN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여러차례 매각설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사실무근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어왔다. 그런데 지난 3월 31일 공시를 통해 스스로 매각 계획을 밝히면서 국내 인수합병 시장을 놀라게 했다.
매각은 물적분할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대HCN의 방송통신 사업부문을 떼어내 ‘현대퓨처넷(존속법인)’과 ‘현대HCN(신설법인)’으로 분할한다. 매각 대상은 기존 현대HCN에서 방송통신 사업부문만 따로 떼어낸 신설법인 현대HCN과 자회사 현대미디어다. 나머지 모든 사업부문은 현대퓨처넷이 담당한다.
현대백화점그룹이 계열사 현대HCN 매각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 강남구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사진=최준필 기자
#그룹 ‘캐시카우’ 시장에 내놓은 이유는
현대HCN은 현재 케이블TV 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현대HCN의 가입자는 2019년 상반기 기준 134만 5365명으로 유료방송 시장 점유율은 4.07%다. LG헬로비전, 티브로드, 딜라이브, CMB에 이어 업계 5위지만 서울 강남과 서초, 관악, 동작, 수도권과 대구 부산 등 대도시 지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가입자당 평균 매출이 높아 업계에선 ’노른자 권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현대HCN은 현대백화점그룹의 캐시카우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실적도 준수하다. 지난해 총매출은 2928억 원, 영업이익은 410억 원을 기록했다. 현금흐름을 나타내는 상각 전 영업이익은 700억 원이었다. 국내 케이블TV 사업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현금 창출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이 같은 ‘현금창고’를 시장에 내놓은 이유는 최근 변화된 유료방송 시장 흐름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때 ‘깃발만 꽂으면 돈 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케이블TV는 각광을 받았지만 IPTV(인터넷TV)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IPTV는 현재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3대 통신사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인터넷과 전화 등을 설치하면서 결합상품으로 IPTV 가입을 유도하면서 3사 점유율이 80%까지 치솟았다. 현대HCN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통신사들과 앞으로도 힘겨운 경쟁을 펼쳐야 한다.
반면 매물로서의 현대HCN의 가치는 현대백화점그룹이 그대로 사업을 이어갈 때보다 더 높다. 국내 유료방송 시장 1위는 KT(31%)고, 그 뒤를 LG유플러스(24.72%)와 SK텔레콤(24.03%)이 뒤쫓고 있다. 2~3위의 점유율이 24%대로 거의 같아 업계 ‘알짜’로 통하는 현대HCN만 인수하면 순위가 한 번에 뒤바뀐다.
현재로선 통신3사가 점유율을 높일 방법은 인수합병 외에 방법이 없다. 앞서 LG유플러스가 CJ헬로를 8000억 원에, SK텔레콤이 티브로드를 1조 5000억 원에 인수를 시도한 이유다. 특히 이들이 공정거래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승인을 받아 인수합병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리스크’도 사라졌다. 현대백화점그룹 입장에선 지금이 가장 몸값을 높게 받을 수 있는 ‘적기’인 셈이다.
시장에선 현대백화점그룹이 핵심 사업인 유통사업의 흐름에 따라 현대HCN 매각을 최종 결정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온라인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현대백화점의 실적도 하향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2조 190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2922억 원으로 18% 줄어들면서 위기감이 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현대백화점그룹은 코로나19 여파로 실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올해 인천공항 면세점 진출 성공으로 대규모 추가 자금 지출을 앞두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최근 그룹차원에서 경영전략을 다시 짜고 사업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케이블TV 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현대백화점그룹 관계자는 “현대HCN 매각 성사 시 추가 매각 대금과 보유 현금을 활용해 그룹 미래 성장 전략에 부합하는 신사업이나 대형 인수·합병에 적극 나설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백화점그룹은 롯데, 신세계 등 경쟁사들처럼 구조조정에 돌입하기보다는 일단 사업 재편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매각 시기 적절했나
현대HCN의 새 주인은 통신3사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재무적 투자자들도 현재 유료방송 시장이 과점상태라 큰 관심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통신 3사의 공식적인 반응은 시큰둥하다. SK텔레콤은 “인수를 검토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KT와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통신 3사가 당장 인수전에 뛰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업계 일각의 해석이다. 실제 KT는 특정 사업자가 가입자 점유율 3분의 1을 넘지 못하게 제한하는 유료방송 합산 규제에 발목이 잡혀있다. 최근 국회와 정부가 규제 재도입보다 사후규제 강화로 가닥을 잡았지만, KT는 단순 점유율 경쟁보다는 기존 사업 육성과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금동원력이 높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각각 티브로드와 CJ헬로 인수 이후 통합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복수의 통신사가 현대백화점그룹에 먼저 현대HCN 인수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통신사들이 물밑에서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수 의사를 드러냈고, 이는 현대백화점그룹의 매각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HCN 매각 과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앞서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가 다른 케이블TV업체들을 수의계약 방식으로 인수했음에도 현대백화점그룹은 공개입찰 방식을 선택한 건 유력한 인수 후보자인 통신사들이 먼저 의사를 표명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향후 현대HCN인수전에선 가격 조정이 최대 관심사로 떠오를 전망이다. 유료방송 업계에선 경영권 가치는 시가총액이 아닌 가입자 1인당 가격으로 계산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시장에선 현대HCN의 가치는 최대 7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통신사들은 티브로드, CJ헬로 인수전으로 한차례 업계 판도가 재편된 상황이라 매수자 우위로 거래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대백화점그룹은 인수 의사를 확인한 뒤 매물을 내놓은 데다 “제 가격을 받지 못하면 매각을 철회하겠다”는 입장도 일찌감치 밝혔다. 인수합병 시장에선 조만간 현대백화점그룹과 인수후보자가 가격을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