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는 이런 사람들을 HSP라 정의했다. 매우 민감한 사람, Highly Sensitive Person의 준말이다. 아론 박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인구의 15~20%는 HSP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다섯 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적지 않는 수치다. 미처 모르고 있을 뿐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매우 민감한 사람들은 자극의 임계점이 낮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빛과 소리, 냄새에 예민하고 단체로 어울리는 것을 싫어한다. 아론 박사는 “눈동자 색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HSP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말했다. 요컨대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뇌의 편도체가 활발해 새로운 자극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불안과 공포도 남들보다 느끼기 쉽다.
HSP 성향을 보이는 직장인들은 “장시간 타인과 있으면 피곤하다” “거절하지 못해 업무를 모두 떠안는다” “걱정이 많은 탓에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 등등의 고민을 하게 된다.
일본의 심리상담사 다케다 유키는 HSP를 ‘섬세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받아들이는 정보도 많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장시간 타인과 있으면 피곤하다” “거절하지 못해 업무를 모두 떠안는다” “걱정이 많은 탓에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 등등의 고민도 하게 된다.
연구에 따르면 “HSP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창의적이고, 예술작품 감상에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어떤 이들보다 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예술가와 시인 중에 HSP가 많은 이유다. 단점도 확인됐다. 바로 “우울증이나 불면증 같은 정신건강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이다.
다케다 상담사는 “HSP가 고쳐야 할 병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먼저 HSP는 온갖 곳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타인의 기분과 상황을 잘 파악하기 때문인데, 알아차린 것들을 일일이 대응하려고 하면 금세 지쳐버린다.
일례로 30대 직장인 여성 A 씨는 “회사에서 도무지 쉴 수 없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휴식시간조차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눈에 띄어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 전화벨이 울리면 동시에 손을 뻗어 모두 대응했다. 다케다 상담사는 “전화벨이 울릴 때 바로 반응하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권했다. 그대로 실천했더니 동료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A 씨는 ‘내가 하지 않아도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나름대로 ‘전화벨이 3번 울리면 1번은 무시한다’는 규칙을 정해서 일의 가짓수를 제한하고 있다.
주위 환경으로부터 과도한 자극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 타인의 감정, 소리, 냄새, 분위기 등등 모든 정보에 민감한 HSP는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자극을 막는 게 좋다. 특히 다케다 상담사가 추천하는 상비품은 마스크와 귀마개다. 덧붙여 카페인이 많은 음료도 피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사실 HSP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고, 주의력이 높아 업무에 있어서도 실수가 적다. 긍정적인 면에 집중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멋진’ 사람들이다. 다케다 상담사는 “HSP 기질이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개발해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HSP를 ‘예민한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섬세한 사람’으로 표현하는 까닭이다.
한편 HSP 가운데서도 유달리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초민감자(Empath, 엠패스)’다. 미국 정신과 전문의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에 따르면, 초민감자는 감정 이입이 지나쳐서 타인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고통 받는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서로 전염되는 경향이 있지만, 초민감자의 경우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온전히 수용하다보니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이처럼 과중한 스트레스와 감정소모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 부신피로증후군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초민감자들은 지나친 감정소모로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감수성을 일종의 재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민감자는 사물을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며, 모든 생명체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지닌다. 따라서 동물보호나 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들이 많다. 올로프 박사는 “엠패스 역시 ‘보통’의 사람들로 단지 감수성이 평균보다 강한 것일 뿐”이라고 전했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기질은 일종의 재능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올로프 박사가 초민감자들과 상담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뭘까. 다름 아니라 “엠패스에게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되도록 적은 인원이나 혼자서 일하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엠패스가 만원전철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고, 시끄러운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근무한다면 분명히 괴로울 터다.
구체적인 직종을 꼽자면 자영업, 자유 기고가, 프리 편집자, 아티스트, 그 외 창조적인 직업이 알맞다. 환경보호나 누군가를 돕는 일도 괜찮지만, 이 경우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아울러 혼자 일할 때도 주의할 점이 있다. 너무 고독을 즐기지 않기, 그리고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기다.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중요하다. 또 회사에 출근하는 엠패스라면 특정일을 ‘재택근무의 날’로 지정할 수 없는지 회사와 상담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반대로 엠패스에게 적합하지 않은 직종도 존재한다. 올로프 박사는 “영업, 홍보, 정치, 큰 팀을 이끄는 관리직, 법정변호사” 등을 뽑았다. 직장 환경으로는 “야심가나 경쟁을 일삼는 동료가 있는 곳도 에너지를 많이 뺏기며 스트레스를 받기 쉽다”고 한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예민보스 체크리스트 다음은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가 공개한 ‘HSP 체크리스트’다. 23개의 질문에 ‘네’ ‘아니오’로 대답해보자. 만약 ‘네’가 12개 이상이면 HSP일 확률이 높다. 다만 어디까지나 참고로만 삼을 것. 어떤 체크리스트도 100% 정확한 건 없다. ‘타고난 예민함을 기질로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주변 환경의 미묘한 변화도 잘 캐치하는 편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다 □통증에 민감하다 □바쁜 날이 계속되면 침대나 어두운 방 등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히고 싶어진다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밝은 빛이나 강한 향, 거친 느낌의 천, 사이렌 소리 등이 불편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며 곧잘 공상에 잠긴다 □소음이 너무 신경 쓰인다 □미술이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양심적이다 □깜짝깜짝 놀란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야 할 때 당황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지 안다(조명이나 좌석 배치를 바꾸는 것 등등)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짜증이 난다 □실수를 저지르거나 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한다 □폭력적인 영화와 텔레비전은 애써 피한다 □너무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배가 고프면 집중이 안 되고 기분이 저하되는 등 강한 반응이 일어난다 □생활에 변화가 있으면 혼란스럽다 □섬세하고 미묘한 향기, 맛, 소리, 예술작품을 즐긴다 □소란스럽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을 피하는 것을 일생생활에서 최우선으로 한다 □경쟁을 해야 한다거나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소심해져서 평소보다 실력 발휘를 못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내가 민감하거나 숫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