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참패 책임으로 대표직 사퇴를 발표한 뒤 국회도서관에 마련된 미래통합당 개표상황실을 나서는 황교안 대표. 사진=이종현 기자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 4월 15일 오후 6시 15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 마련된 미래통합당 개표상황실은 탄식과 적막감이 감돌았다. 더불어민주당과 범진보 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이 과반을 훌쩍 넘는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는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에 할 말을 잃었다. 더 큰 충격은 개표가 진행되면서 다가왔다. 보수 텃밭인 영남권을 제외하고 수도권, 충청권 등에서 사실상 ‘완패’했기 때문이다.
개표 결과 더불어민주당(지역구 163석)과 더불어시민당(비례대표 17석) 의석수는 180석, 미래통합당(지역구 84석) 미래한국당(비례대표 19석) 의석수는 103석으로 나왔다. 보수당이 지역구에서 100석 미만을 차지한 것은 1992년 14대 총선 이후 처음이다. 개헌저지선(100석)을 겨우 넘긴 처참한 성적표였다.
황교안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종로 패배가 확인되자 4월 15일 심야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모든 당직을 내려놓겠다”며 대표직을 사퇴했다. 김종인 총괄선거대책위원장 역시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통합당의 변화가 모자랐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선거를 이끌던 ‘투톱’은 그렇게 떠났다.
문제는 남은 당 지도부 역시 ‘붕괴’ 수준이라는 점이다. 11명의 최고위원 중 이번 총선에서 생존한 이는 조경태 최고위원(부산 사하구을·5선)이 유일하다. 통합당 당헌에 따르면 당 대표직 공석이 되면 원내대표가 권한을 대행한다. 하지만 심재철 원내대표 역시 지역구 안양 동안구을에서 민주당 이재정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통합당 내부에서는 급하게 지도부 체제 수습을 위해 여러 방안이 검토되는 중이다. 조경태 최고위원이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거나, 현 지도부가 일괄 사퇴하고 당선자 중심으로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를 뽑아 임시 대표를 맡기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구성할 때까지 당 안팎의 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앞서 20대 총선에서도 ‘옥새파동’ 여파로 패배한 새누리당(통합당 전신)은 김무성 대표가 사퇴하면서 원유철 원내대표가 당대표 권한대행을, 정진석 의원이 새 원내대표를 맡았다. 곧바로 비대위가 꾸려졌지만, 전당대회를 열어 이정현 대표가 선출되기까지 여러 혼란을 겪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중도·보수 통합 과정에서 통합당이 정한 전당대회 시기는 오는 8월이다. 앞으로 약 4개월간 임시 지도체제 수습, 비대위 구성, 전당대회 준비까지 당은 급박하게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들은 당의 처참한 패배 속에서도 ‘생환’한 중량감 있는 의원들이다. 조경태 의원뿐만 아니라 정진석(충남 공주·부여·청양) 주호영(대구 수성갑) 서병수(부산진갑) 의원이 당내 최다선인 5선을 달성했다. 이들 중 몇몇은 ‘당권’을 두고 물밑에서 긴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통합당 핵심 관계자는 “5선 의원 모두 ‘역할론’을 두고 고민하는 양상”이라며 “이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중진 회동을 통해 당의 진로나 지도체제 등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총선으로 통합당 잠룡들의 대권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황교안 전 대표를 비롯해 오세훈 전 시장, 나경원 의원,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통합당 전신)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줄줄이 낙선했다.
오히려 공천배제 결정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가 ‘생존’한 인사들의 스탠스가 주목을 받는다. 홍준표 전 대표(대구 수성을) 김태호 전 지사(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가 대표적이다. 홍 전 대표는 당선이 확실시된 후 선거사무실에 나와 “우리(미래통합당)가 참패한 것이 안타깝다”며 “조속히 당으로 돌아가 당을 정상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 보수의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며 당 재편을 예고했다. 김 전 지사 역시 복당 후 대권 도전을 시사했다.
윤상현 의원(인천 동구미추홀을·4선)과 권성동 의원(강원 강릉·4선)도 무소속으로 나와 승리했다. 복당할 경우 윤 의원은 ‘수도권 대표주자’로 당권에, 권 의원은 원내대표 선거에 나서겠다며 예고한 상태다.
황교안 전 대표는 총선을 앞두고 무소속 출마자들을 향해 ‘영구 복당정지’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실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당내에선 당장 ‘한 석’이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얼른 받아야 한다는 의견과 ‘원칙론’을 지켜야 한다는 반론이 교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구 복당정지를 언급한 황 전 대표 체제 지도부가 사실상 해체됐다는 점에서 결국 복당을 받아주지 않겠느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서울 마포을 김성동 미래통합당 후보 현장유세를 찾아 유권자들에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유승민 의원. 4·15 총선 참패로 당 지도부 공백이 발생한 상황에서 유승민 의원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된다. 사진=박은숙 기자
당의 권력구도 향방은 무엇보다 ‘비대위 체제’ 전환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비대위원장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가 그래서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다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김 전 위원장은 기자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비대위원장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그런 것은 아직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선을 그은 상태다.
당내에서는 김 전 위원장이 비대위를 맡는 조건을 두고 결국 대대적인 ‘전권’과 여유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총괄선대위원장을 수락할 때처럼 간단치 않은 작업이라는 것이다. 당 핵심 관계자는 “선거는 패했지만 김종인 말고 대안이 누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당에서 역할론을 간곡히 부탁하면 ‘김종인 비대위’ 불씨를 충분히 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권준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