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엽 감독이 LG에서 사퇴하며 3년간의 동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진=KBL
‘농구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대학 선수들은 자연스레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대를 다루며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인기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이상민 오빠’를 외치는 장면이 수없이 연출되기도 했다. 김병철, 문경은, 서장훈, 신기성, 양희승, 우지원, 전희철 등은 이른바 ‘연예인급 인기’를 누렸다. “팬레터가 마대자루에 담겨 숙소로 왔다”는 증언들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농구대잔치 흥행에 힘입어 프로농구(KBL)가 출범했지만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관중과 중계 시청률은 하락을 거듭했다. 그 시절 그 오빠들은 유니폼을 벗었고 그 이후 세대 선수들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시련을 겪고 있는 리그만큼이나 왕년의 스타들도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선수가 아닌 지도자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매직 히포, 사실상 경질?
지난 9일 창원 LG 세이커스는 3년간 팀을 이끌어온 현주엽 감독이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번 시즌은 현 감독의 계약 마지막 시즌이었다. 재계약 없이 결별을 택했다. 정규시즌 9위로 저조한 성적을 낸 것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농구계에서는 ‘사의 표명이 아닌 사실상 경질’이라는 평가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3년간 9위, 3위, 9위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둔 데다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선수단을 꾸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2018-2019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4강에서 만난 인천 전자랜드에 0-3으로 참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LG는 KBL 역사에서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없는 3팀 중 하나로 누구보다 우승에 목마른 팀이다.
농구계를 떠나 있거나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던 현주엽 감독은 지도자 경력 없이 LG 지휘봉을 잡았다. 경험 부족이 약점으로 꼽혔지만 이미 감독을 지낸 김영만 코치를 데려오며 이를 채우려 했다. 하지만 3시즌 중 2시즌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구단과 동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감독 부임 1, 2년 차에는 김시래-김종규라는 국가대표급 자원을 보유하고도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질타를 받았다. 김종규가 떠난 3년 차에는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지적은 감독 생활 내내 따라다닌 꼬리표였다.
그의 재임 기간 그림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역 스포츠단 감독으로는 드물게 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며 농구단 내부 생활까지 공개했다. 보수적인 국내 스포츠 환경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이는 LG를 전국구 인기 구단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무명 선수이던 정희재, 김동량 등은 선수로서 성장과 더불어 올스타 투표에서 12위 이내에 든 스타로 등극했고 구단 프런트 직원까지 유명인사가 됐다.
#기로에선 ‘산소 같은 남자’
이상민 감독도 현주엽 감독과 함께 2019-2020시즌을 마지막으로 서울 삼성과 계약 기간을 끝냈다. 아직 재계약 여부는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재계약 당시 3월을 넘기지 않았던 것과 상반된다.
이상민 감독이 삼성에서 보낸 6년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감독 데뷔 시즌(2014-2015)을 최하위(10위)로 출발한 그는 다음 시즌부터 5위와 3위를 기록하며 반등했다. 2016-2017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에 올라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재계약에 성공한 이상민 감독은 다시 플레이오프 진출권에서 벗어났다. 7위-10위-7위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덩달아 평가도 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율적인 팀 운영은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재임 기간 6년 중 성과(플레이오프 진출)를 낸 시즌은 2시즌뿐이었다. ‘특정 선수(라건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시즌이 조기 종료된 이후 50일 가까이 지난 시점, 재계약 대상 감독 중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감독이 많다. 계약이 종료된 6명의 감독 중 현주엽 감독만 결별이 확정됐다. 다수 감독이 재계약 논의가 긍정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이상민 감독은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문경은(왼쪽), 이상민 등 이른바 ‘농구대잔치 세대’들은 여전히 3점슛 맞대결 등 팬들을 위한 이벤트에 앞장서고 있다. 사진=KBL
#농구대잔치 스타들의 고군분투
현주엽·이상민 감독 이외에도 많은 농구대잔치와 프로 전환 초기를 경험한 과거의 스타들이 지도자에 도전하며 분투했다. 추승균 감독도 전주 KCC 지휘봉을 잡고 냉·온탕을 오갔다. 그는 정식 감독에 부임한 첫 시즌(2015-2016시즌) 팀을 정규리그 우승에 올려놨지만 직후 최하위로 떨어지는 진기록을 냈다. 심기일전 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2년 재계약까지 따냈지만 2018-2019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성적 부진이 이유였다.
‘농구대잔치 마지막 세대’이자 쌍둥이 선수로 주목받았던 조동현 감독도 부산 KT 감독으로 쓴맛을 봤다. 적극적인 트레이드 등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재임 시절 3년간 7위-9위-10위의 성적으로 감독 생활을 마무리했다.
농구대잔치 ‘오빠’들에게 시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2013시즌부터 정식 감독직에 올라 8시즌 넘게 ‘장기집권’ 중인 ‘람보 슈터’ 문경은 서울 SK 감독은 감독으로도 성공한 스타플레이어로 꼽힌다. 그는 정식 감독 데뷔 시즌부터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재임 기간 8시즌 중 팀을 5회 플레이오프에 올려놨다.
2017-2018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조기에 마무리된 2019-2020시즌에도 원주 DB와 함께 공동 1위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선수 시절 ‘터보가드’로 불리며 이상민 감독의 대항마로도 꼽히던 김승기 감독도 성공적인 지도자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 전창진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이미 우승을 경험한 바 있는 그는 2016-2017시즌 안양 KGC인삼공사를 이끌고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모두 석권해 통합우승을 이뤘다. 이번 시즌에도 핵심 자원 오세근이 부상을 당했지만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3위로 순항하며 호시탐탐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여전히 농구계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농구대잔치 세대를 꼽는다. 올드보이 매치, 3점슛 대결 등 이들을 활용한 이벤트는 KBL의 단골 소재다. 때론 ‘우려먹기, 추억팔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대중의 반응을 끌어내기 좋은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농구계 관계자는 “아직까지 농구대잔치 시절 스타들이 좋은 모습을 보이며 농구계를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라고 전했다.
2011-2012시즌 133만 3861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던 KBL 통산 관중은 2017-2018시즌 84만 8507명까지 떨어졌다. 조기 종료로 아쉬움을 남긴 이번 시즌은 감독이 예능에 나서고 경기 내내 선수와 감독이 중계 마이크를 착용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부활을 위해 몸부림치는 KBL의 변화에 농구 전성기를 경험한 ‘과거의 오빠들’이 향후 어떤 역할을 할지 팬들의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