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1일, IBK기업은행은 미국 뉴욕지점의 이란 제재 위반 혐의와 관련해 미국 검찰 및 뉴욕주 금융청과 8600만 달러(한화 약 1049억 원)의 벌금을 납부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검찰이 2014년 5월 조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이다. 벌금 규모는 기업은행 뉴욕지점이 벌어들이는 순이익(160억 원)의 6년 치에 달한다. 돈도 돈이지만 가장 큰 타격은 ‘평판 리스크’다. 자금세탁방지법을 위반한 은행이라는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이 최근 미국 사법당국과 대(對)이란 제재 위반 사건과 관련한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1000억 원대의 벌금에 합의하면서 국내 은행권도 술렁이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발단은 기업은행이 거래하던 A 사였다. A 사는 이란과 제3국간의 중계무역을 하면서 기업은행의 원화결제계좌를 이용한 허위거래로 미국 달러화 등을 해외로 송금했다. 기업은행은 A 사의 허위거래를 제때 파악하지 못했고, 송금 중개 과정에서 미국의 자금세탁방지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았다.
미국 금융당국뿐 아니라 현지 검찰까지 나선 것은 단순 자금세탁방지 미흡을 넘어 이란 제재 위반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란을 달러화 결제 시스템에서 퇴출하는 등 강도 높은 이란 제재에 나서고 있다. 이번 벌금 부과로 뉴욕 금융청은 조사를 종결한 반면 미국 검찰이 2년간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은행들이 이번 기업은행 사례를 눈여겨보는 것은 비슷한 이유로 미국 측의 제재를 받을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측이 국내 은행들에 부과하는 벌금 수준도 날이 갈수록 커지는 중이다.
국내 시중은행이 미국 당국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처음 벌금을 부과 받은 것은 20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은행은 외환은행 시절이던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 지점에서 혐의거래에 대한 보고를 제때 하지 않아 110만 달러(약 13억 1200만 원)의 벌금을 물었다.
이번에 벌금에 합의한 기업은행은 2014년부터 조사를 받았고, 2017년에는 아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직접 나서 NH농협은행,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농협은행 뉴욕지점은 2017년 말 뉴욕 금융청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 업무 미흡으로 1100만 달러(약 119억 원)가량의 과태료를 부과 받았다. 하나은행의 과태료보다 10배가량 많아진 액수다. 그리고 이번 기업은행의 벌금은 1000억 원으로 다시 농협의 8배에 달한다. 이런 추세라면 다음 타깃이 내야 할 벌금은 자칫 조 단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커지고 있다. 실제 금융권에서는 “BNP파리바은행의 사례를 볼 때 과장되거나 기우에 불과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2014년 미국 정부는 프랑스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에 89억 7000만 달러(약 9조 2032억 원) 벌금을 물렸다. 금융제재 대상국가인 이란, 수단, 쿠바 등과 금융거래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역대 미국 경제제재 위반 벌금 중 최고액을 부과 받은 BNP파리바는 6조 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 분기 순손실을 냈고 BNP파리바그룹 회장이 사퇴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미국 정부가 올해 초부터 이란은 물론 북한 관련 금융제재 위반에 대해 고삐를 바짝 죄고 있어 금융권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국내 은행들은 이미 2018년 미국 정부로부터 강력한 경고를 받은 상태다. 미국 재무부는 2018년 9~10월 국책은행 중에서는 KDB산업·기업은행, 시중은행 중에서는 KB국민·신한·하나·NH농협·우리은행 등에 직접 연락해 “대북제재를 준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 재무부가 사전에 이메일로 ‘북한 관련 회의를 열고 싶다’고 알린 뒤 은행들과 순차적으로 연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재무부에서는 테러·금융정보 담당 관계자가, 국내 은행은 준법감시 담당 부행장급 인사가 전화회의에 참석했다.
미 재무부 측은 국내 은행이 추진하는 대북 관련 사업 현황을 묻고 대북제재를 위반하지 않길 바란다는 당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은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경고’나 다름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는 남북 정상이 평양선언을 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러’ 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기업은행과 농협은행은 행장이 2018년 말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현지 지점들의 자금세탁방지 등 내부통제 업무를 챙기고 미국 금융당국자들과 면담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다.
문제는 북미 관계가 삐걱대는 와중에 우리 정부가 독자적인 남북협력 구상을 현실화하는 데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공개적인 우려를 표명할 정도다. 해리스 대사는 올 초 한국의 대북제재 공조 이탈에 대해 “대북제재에 저촉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해리스 대사는 남북이 추진 중인 개별관광을 언급하면서 “제재의 틀 내에서 여행은 인정된다”면서도 “여행자가 들고 가는 것 중 일부는 제재에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들고 가는 것’에는 현금이 포함된다. 과거 금강산 면세점 등에서 남한 측 관광객이 달러로 결제했던 것처럼 미국 달러를 들고 북한에 들어갈 경우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은행들의 우려다.
국내 시중은행 한 고위 관계자는 “솔직히 현 정부는 금융 분야, 특히 글로벌 시스템에 관해 잘 모른다”면서 “유엔 대북제재 결의 2087호는 달러 유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금액이 크지 않더라도 유입된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과장이 아니라 만약 달러 유입에 관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느 은행에서 환전을 했는지에 따라 해당 은행의 존폐가 갈릴 수도 있다. 지점 직원이 별 생각 없이 바꿔준 몇백 달러 때문에 해당 은행이 아예 글로벌 달러 결제 시스템에서 쫓겨나는 상황까지도 올 수 있다”고 강한 우려를 표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