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성이라면 국방의 의무는 대부분 피해갈 수 없다. 손흥민 이전, 우리나라 역대 축구스타들도 예외는 아니다. 1973년, 올림픽, 아시안게임, 예술경연대회 등 입상자에게 대체복무 기회를 주는 병역특례법이 제정된 이래 최초 수혜자인 1976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이후 많은 이들이 혜택을 받았지만 유난히 축구 종목에서는 좀처럼 대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국제대회 성과가 많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비롯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으로 많은 축구선수들이 병역혜택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남긴 선수들도 꽤 있다.
차범근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왼쪽)은 여전히 독일에서 ‘레전드’로 대우받고 있다. 오른쪽은 독일 축구 레전드 프란츠 베켄바우어. 사진=연합뉴스
#복무기간에 발목 잡혀 ‘국내 유턴’한 차범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스타 차범근은 공군에서 복무했다. 당시에는 육·해·공군이 각각 체육부대를 운영했다. 군복무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국군체육부대가 창설된 것 1984년이다. 이전까지 육·해·공군은 서로 스타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경신고 재학 시절 이미 국가대표에 발탁될 정도로 축구스타였던 차범근은 공군을 선택했다.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길었지만 ‘복무기간을 같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공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이후 차범근은 당시 세계 최고로 평가받던 서독 분데스리가로 향했다.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어 레버쿠젠의 레전드로 알려져 있는 차범근은 정작 SV 다름슈타트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1978년 12월 30일 보훔과의 홈경기에서 77분간 그라운드를 밟았다. 전반전과 후반전 각각 1개의 도움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아시아 무명선수의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이 다름슈타트 유니폼을 입고 치른 경기는 단 1경기에 그쳤다. 당초 복무기간을 줄여주기로 했던 공군 측에서 ‘남은 기간 복무를 해야 한다’고 번복하며 귀국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차범근은 할 수 없이 남은 군복무를 마친 후에야 다시 독일로 떠났고 그때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2003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안정환의 훈련소 입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진=연합뉴스
#군사훈련 도중 소집된 국가대표 안정환
월드컵 4강 신화가 쓰여진 2002년,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이후 라커룸에 내려가 선수들을 격려하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장 홍명보로부터 예상치 못한 부탁을 받았다. 아직 군복무를 하지 않은 후배들에게 병역혜택을 달라고 한 것이다. 이 장면은 방송국 전파를 타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즉시 “걱정하지 말라”고 확답했다. 라커룸은 박지성, 설기현, 송종국, 이영표, 이천수 등 군복무를 앞두고 있던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김 전 대통령의 결단에 유난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안정환은 덩달아 잊을 수 없는 훈련소 생활도 겪었다. 월드컵 이후 1년 뒤인 2003년 6월 4주간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기 위해 훈련소에 입소한 안정환은 이 기간 중 훈련병 신분으로 대표팀에 합류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안정환이 훈련소에 입소한 시기,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이 이끌던 당시 A대표팀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서울에서 친선경기 2연전을 펼쳤다. 우루과이와 먼저 경기를 치른 대표팀은 공격진에 차두리 최용수 설기현을 내세웠다. 이천수 조재진 왕정현 등을 교체로 투입했지만 0-2로 영패했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불과 1년밖에 안 된 상황이어서 대표팀을 향한 국민들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선수들 몸짓 하나, 감독의 용병술 하나에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다. 우루과이전 패배에 여론이 들끓었고 시선은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안정환에게 쏠렸다. ‘훈련을 받고 있는 안정환을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당시 안정환은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축구스타로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훈련소 입소 직전인 2003년 5월 31일 벌어진 한일전에서는 1-0 승리를 이끈 결승골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유니폼을 벗어던진 세리머니도 화제였다. 어깨에 새겨진 ‘혜원(아내 이름) 러브 포레버’ 문신은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국방부 홈페이지에도 안정환 선발 요구가 빗발치자 결국 국방부는 결단을 내렸다. ‘국민 여론을 감안해’ 훈련병 안정환의 대표팀 합류를 허락한 것.
결국 6월 2일 입소한 안정환은 아르헨티나전을 하루 앞둔 10일 훈련소를 나와 대표팀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주일 이상 축구 관련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고 훈련소 입소로 감독 구상에서 제외됐던 안정환은 경기에 활용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와 경기 내내 벤치만 지키다 “투입이 됐더라도 (몸 상태 때문에) 팀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훈련소로 복귀했다.
박지성의 훈련소 내부 사진은 온라인상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그럼에도 맨유 구단은 원본 사진을 찾지 못한 듯 보인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맨유의 박지성 사진 찾기 대작전
2002 한일월드컵 멤버였던 박지성도 병역 혜택을 받았다. 박지성은 훈련소 입소 당시 안정환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의 훈련소 생활이 재조명됐다.
박지성이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생활을 마치고 퀸즈파크 레인저스를 거쳐 PSV 에인트호번에 임대로 돌아갔던 2014년, 유럽 현지에서 박지성의 훈련소 생활과 관련한 뉴스가 나왔다. 맨유 구단에서 박지성의 군복무 관련 사진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맨유는 2014년 구단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정비하면서 구단을 거친 선수 중 군대와 얽힌 스토리를 가진 선수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과거의 선수들, 각각 프랑스군과 덴마크군에 단기간 몸담았던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과 함께 4주 군사훈련을 받은 박지성의 사례를 소개하려 했다.
슈퍼스타였던 박지성의 군사훈련 사진은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꾸준히 반복 게시됐다. 그가 전투복을 입고 수류탄을 던지고 있거나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팬들에게 이색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맨유는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사진 원본을 원했다. 대한민국 국방부에 협조 요청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결국 맨유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 내 박물관에는 “한국 육군으로 복무했다”는 짧은 설명과 함께 박지성이 군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은 사진이 전시됐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