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을 양향자 당선자. 사진=박은숙 기자
―7선에 도전하는 천정배 의원을 압도적 표 차이로 이겼다(득표율 75.8% 대 19.5%).
“이 정도 큰 표 차가 날거라고는 생각 안했다. 다만 지역민들에게 인사하는데 ‘이번에는 양향자가 해야지’라는 말씀 많이 들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내건 ‘정치는 경제다, 경제는 양향자’ ‘민생당엔 민생이 없습니다, 미래당엔 미래가 없습니다’ ‘양향자가 미래고, 민주당이 민생입니다’ 등 슬로건은 모두 지역 유권자들 말을 듣고 반영해 만든 것이다.”
―20대 총선 때는 천정배 의원에게 패했다. 당시와 지금은 분위기가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광주 표심은 큰 틀에서 움직이는 면이 있다. 20대 총선에선 ‘반문정서’ ‘호남홀대론’ 프레임이 공고했다. 민주당 60년 지지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됐고, 그 대안으로 국민의당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당을 선택했다기보다 민주당에 한번은 회초리를 들기 위해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국민의당은 광주 전석 당선시켜줬는데 4년 동안 바른미래당, 대안신당, 민생당 등 이합집산만 반복했다. 캐스팅보트나 대안정당으로 역할을 못했다. 반면 민주당 8명의 광주 원외 지역위원장들은 똘똘 뭉쳤고, 민주당은 정권교체까지 이뤄냈다. 광주시민들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본인만의 선거운동 노하우가 있나.
“지난해 12월부터 3월까지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5시에 지역구에 있는 풍암호수공원을 돌았다. 하루에 딱 한 분만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 같이 사진 찍어서 보내드리고, 오후에 다시 전화를 드렸다. 그게 선거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130명 정도 만난 것 같다.”
―2016년 ‘문재인 키즈’로 정계 입문했다. 삼성전자 임원을 그만두고 정치를 시작한 이유가 있다면.
“기업에서 반도체를 개발·설계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디자인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반면 정치 보면서는 GDP(국내총생산)에 전혀 도움은 안 주고 싸움만 하는 쓰레기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에게 메일이 왔다. 내게 직접 온 것도 아니고 회사 메일로 왔다. 제목이 ‘문재인 의원실입니다’였다. 그때만 해도 문재인 대표 인기도 없었고, 민주당도 위기로 조만간 없어질 당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 영역으로 나와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묘한 느낌이 들어 만났다.”
양향자 당선자는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와의 대화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말한다. 사진=박은숙 기자
“정치 자체를 싫어했으니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재인 당시 대표도 처음 만났다. 짧게 몇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진실된 모습을 봤다. 평소 고도원 이사장의 ‘꿈 너머 꿈’을 좋아했는데, 문 대표가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 당시 내가 한국 나이로 49세였는데 문 대표가 ‘삼성에서 꿈을 이루셨는데, 나이 오십을 앞두고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살고 싶으냐’ 물었다. 예전에 내가 삼성에서 30주년을 맞으며 내가 겪은 어려움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배들에 멘토가 돼주려 했다. 그런데 문 대표과 대화하며 이런 일을 대한민국 전체로 확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거다.”
―정치 입문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가족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비밀리에 진행된 영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가족에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만 말했는데 ‘절대 안 된다. 이혼하자’할 정도로 반대 심했다. 그러다 남편이 나와 함께 문재인 대표를 만나고, 따로 또 보고 하더니 같이해도 되겠다고 동의해줬다. 문재인 대통령과 남편이 정서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문 대통령은 거제 출신으로 부산에서 활동했다. 남편도 거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를 다녔다. 또한 나중에 알았는데 남편이 ‘노빠(노무현빠)’였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진보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부산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민주당을 지지할 수 있느냐고 핀잔을 듣는다고 하더라.”
―삼성 임원으로,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남편이 많은 지원을 했을 것 같다.
“남편은 가정적이고 가정의 삶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삼성 임원 때도 거의 공인이었다. 이어 정치영역으로 부인을 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국가에 아내를 헌납했다고 우스갯소리로 불만을 말한다. 근데 진심으로 뒤에서 외조를 잘해준다. 올해 5월 6일이 결혼 30주년이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때 ‘휴지 접는 원장님’으로 유명했다. 국회 들어가서 바꾸고 싶은 작은 움직임이 있다면.
“페이퍼리스(Paperless), 서류 없는 디지털 회의다. 한국의 발전된 IT기술을 충분히 활용하는 국회 모델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인재개발원에서도 회의 때 종이를 전혀 안 썼다. 처음에는 불편해하다가 일주일 정도 지나자 익숙해졌다. 이를 통해 토너나 종이 비용 1억 원을 절감했다. 특히 책자·문서 만들고 오타 나오면 다시 제작하는 비효율적인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비효율과 생산성을 저해하는 일들은 과감하게 없앨 것이다. 우리 의원실부터 바꾸면 차츰 국회 전체로 퍼져나갈 거라고 본다.”
―코로나19 사태로 산업계가 어렵다. 경제인 출신으로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해결방안을 단기·중기·장기적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고용유지가 가장 큰 문제다. 선거운동하면서 만난 시민들도 너무나 힘들어 하셨다. 소상공인·영세계층에 긴급재난지원자금을 신속하게 드려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이번 위기가 산업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본다. 실질적 산업 변화에 맞춰 촘촘하게 투자와 지원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국회에서 할 일이 많다. 법안과 정책을 뒷받침해줘야 한다. 일하는 국회가 그래서 필요하다.”
2016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정기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정견발표를 하고 있는 양향자 당시 여성최고위원 후보자. 사진=박은숙 기자
―초선 의원으로서 각오를 들려 달라.
“선거운동 기간 지역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모난 데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균형감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게 진보의 가치인 것 같다. 다함께 잘사는 것이다. 삼성에서 다닌 30년을 포함해 삶의 궤적이 정치인이 되기 위한 트레이닝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삼성에서도 안 되고 어려운 것은 다 양향자에게 왔다. 나도 그런 도전을 좋아했고 이겨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처음부터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