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I 오일 선물 가격이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로 떨어지면서 투자자들이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 사진=픽사베이
선물의 만기 결제 방식은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게 현금결제와 실물인수다. 원유는 실물인수 방식으로 선물 만기까지 선물을 들고 있으면 원유를 받아가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여긴다. 그래서 선물 만기까지 들고 있는 사람이 최종 결제 가격에 해당하는 인수금액과 원유를 직접 교환해야 한다. 5월물 선물은 4월 21일이 만기여서 4월 21일까지 들고 있는 사람이 원유를 인수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유조선이나 저장 창고가 부족해 원유를 담을 곳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투자자들이 실제로 텍사스까지 원유를 받으러 갈 수도 없어 매도에 나서면서 역사적인 폭락장이 펼쳐졌다. 4월 21일 새벽 0원을 지나 마이너스로 가격이 돌입하면서 웃돈을 주고 서로 기름을 가져가 달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마이너스 37달러를 기록하면서 선물을 확정 받으면 약 160리터 원유에 37달러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원유 가격이 마이너스로 돌입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상 처음으로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증권사 거래 시스템인 홈트레이딩 시스템(HTS)이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가격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 둔 삼성증권 등 몇 개 증권사 외에는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가격이 0달러를 넘어 마이너스로 돌입하면서, 실제로는 마이너스인데 HTS 상 가격은 오히려 상승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특히 HTS를 이용하는 개인투자자들이 많이 쓰는 키움증권에서 문제가 크게 발생했다. 키움증권에서는 HTS가 먹통이 되면서 개인투자자들이 매도로 대응을 할 수 없었고 -40달러까지 떨어지는 피해를 그대로 받게 됐다.
또한 키움증권 HTS는 마이너스 가격을 플러스로 인식하여 평가손익을 엉뚱하게 표시하기도 했다. 키움증권 한 고객이 보내온 당시 상황 사진을 보면 먹통 사태 당시 평가손익이 플러스 1억 243만 8541원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7800만 원이었다. 또한 차트도 HTS가 마이너스 가격을 플러스로 인식해 차트가 반대로 나타났다. 실제 거래 가격은 마이너스 40달러까지 폭락했으나 당시 차트에서는 플러스 40달러로 폭등학고 있다. 실제와는 다른 가격을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도 존재했다.
가격에 하한가 0.025라고 적힌 부분 때문에 마이너스로 갈 줄 몰랐다는 투자자도 있었다. 한 키움증권에서 거래한 투자자는 “모든 피해자들이 하한가에 0.025달러라고 표시가 없었다면 절대 진입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오일 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졌지만 오히려 폭등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프. 키움증권 HTS 캡쳐
HTS 시스템이 먹통이 되다보니 반대매매(증권사가 증거금이 부족할 때 강제로 포지션을 청산하는 것)가 되지 않았다. 반대매매가 되지 않고 손절도 되지 않으면서 마진콜을 넘어 캐시콜이 쏟아지게 됐다. 마진콜은 증거금이 날아가는 수준이지만 캐시콜은 증거금을 날리고 거기에 빚까지 지게 된다.
문제가 발생한 미니 크루드 오일 종목은 한 계약당 증거금이 대략 500만 원 수준이다. 그런데 마이너스 폭락을 하면서 한 계약당 2300만 원 씩 빚을 지게 됐다. 피해를 입은 유 아무개 씨는 “유지증거금까지 잃는 거야 이해를 하는데 여기에 2300만 원씩 빚을 갚으라니 당황스러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선물로 캐시콜이 나오면 은행에서 빚진 것과 똑같이 투자자가 갚아야 한다. 이를 갚지 않고 3개월이 지나면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키움증권 피해 투자자는 “키움증권의 시스템이 정상이였다면 마이너스 호가가 보이는 즉시 청산을 했을 것”이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는 모른다. 다만 3시 6분부터 마이너스 0.025 부분에서 지정가스탑 주문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불가능해 키움 나이트데스크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통화대기만 18분 동안 이어졌고 끝내 통화연결은 불가능했다. 끝내 청산 노력에도 청산이 불가능했고 시스템이 마비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키움증권이 도마 위에 오른 까닭은 피해자도 가장 많지만 내놓은 보상안이 피해자들의 눈높이보다 기대 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투자증권(한투)의 일부 투자자들은 캐시콜로 발생한 미수금을 전액 면제받고, 마진콜 발생시점을 기준으로 약 20% 위탁증거금을 회복해주는 보상안을 받아든 것으로 알려졌다. 즉 한투 구제안을 보면 2300만 원씩의 빚은 면제해주고 여기에 20% 정도 위탁증거금인 1계약 당 100만 원 정도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반면 키움증권은 1계약당 500만 원 정도 구제안을 내놓는다고 밝혔다. 2300만 원 빚에서 500만 원씩을 제하더라도 1계약 당 1800만 원씩의 빚이 투자자에게 그대로 남는 셈이다. 빚더미에 오른 투자자들은 최대 10억 원까지 피해를 본 경우도 있었다. 키움증권은 현재 내놓은 투자자 보상안이 확정된 게 아니며 재차 논의 중이라 공식적인 답변은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