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잉글랜드 브리스톨 시티 위민에 입단한 전가을은 코로나19 여파로 리그가 중단돼 현재 한국에서 홀로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팀 올라갈 일만 남아” 너스레
지난 3월 초 국내로 돌아온 전가을은 경기도 하남 인근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팀 훈련을 진행할 수는 없기에 몸만들기에만 열중한다고. 그는 “이제는 내가 축구선수인지 헬스 하는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 팀에서도 시점을 정해두지 않고 있다. 영국을 포함해 유럽은 지금 우리나라보다 상황이 심각하니까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전가을에겐 갑작스러운 리그 중단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2019년 11월 국내 리그가 종료되고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0년 1월 말이 돼서야 잉글랜드에 진출했고 시즌 중 팀에 합류했다. 그는 “휴식을 하다 갑작스레 가게 됐다. 가자마자 경기에 뛰었지만 몸이 덜 만들어진 상태였다. 한 달 정도 끌어올려서 ‘이제 됐다.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축구가 멈췄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팀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전가을은 “유독 이번 시즌 우리 팀(브리스톨)에 부상자가 많았다. 내가 합류한 이후로도 모르던 얼굴이 불쑥불쑥 나타나더라. 부상으로 빠져 있다가 회복한 선수들이었다”면서 “리그가 중단된 기간에 부상 선수들이 거의 회복했다. 경기가 재개되면 팀이 올라갈 일만 남은 것 같다”며 웃었다.
#‘회의감’을 새로운 도전 계기로
전가을은 축구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1988년생)에 잉글랜드로 향했다. 2009년부터 국내 실업무대(WK리그)에 뛰어들었고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2007년부터 활약해 101경기에 뛰었다. 미국여자축구리그(NWSL), 호주여자축구리그(A리그)도 경험했다. 브리스톨에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해외에서 경험적인 부분을 더 인정해주더라. 한국 나이 서른셋인 내가 가장 팀에서 나이가 많을 정도다. 팀에서 베테랑으로서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잉글랜드 진출 직전, 그는 선수로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대표팀에서도 좀 멀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면서 축구가 힘들게 느껴졌다. 지치기도 했다. 주변에서 ‘좀 내려놔라’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그만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나이가 많은 게 어때서? 내가 왜 그만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 도전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며 다시 힘을 냈다. 그는 “해외에 나오면서 정말 배우는 것이 많다. 다시 열정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흔히 우리나라 훈련이 혹독하고 해외는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겪어보니 그 반대다. 브리스톨 오고 나서 피지컬 훈련,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데 ‘이거 들면 나 뼈 부러지겠다’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모두 아무렇지 않게 하더라. 그런데 차츰 무게를 올리니까 나도 그걸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만들어지고 결국 빠른 템포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한국에 있을 땐 항상 부상으로 고생했는데 지금은 아픈 곳도 없다. 그동안 아프니까 훈련을 적게 하고 경기장 위에서 모든 걸 쏟아낸다는 생각이었는데 잘못된 것이었다. 경기장 밖에서 준비를 더 많이 해야 경기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 보고 배우며 마음을 열게 됐다”는 전가을은 인터뷰에 동석한 자신의 ‘멘토’ 이상윤 해설위원과 함께 V로그 촬영에 임하기도 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팬과의 소통에 눈을 뜨다
축구 외적으로도 새롭게 느끼는 것이 많아졌다. 오로지 축구만 보고 살아왔던 과거와 달리 운동장 밖의 생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그는 “국내 환경도 그렇고 나도 좀 고지식했던 것 같다”면서 “해외 선수들을 보니 경기장 밖에서도 자신을 오픈하고 팬들과 소통하더라. 나는 이전까지 그런 것을 안 좋아했는데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소셜미디어 같은 것도 열심히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30대가 되면서 전가을에게는 선배 선수로서 책임감도 생겼다. 이전까지 국내에선 선수 생활을 길게 하는 선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현재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소위 ‘한국 여자축구 황금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경기장을 지키고 있다. 2019 여자 월드컵에선 수비수 황보람(1987년생, 화천 KSPO)이 국내 최초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엄마 선수’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전가을은 “‘롤모델’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는 아니지만 나를 포함해 조소현(웨스트햄 위민) 등 또래 선수들이 어느 정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그만두면 여자축구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라며 “나도 ‘좀 더 이끌어주고 길을 터주는 선배들이 있었다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후배들이 나중에 ‘그 언니들이 이렇게 해줬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음 단계에 나가려는 후배들이 ‘전가을도 했잖아’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전가을은 통산 A매치 101경기에서 38골을 기록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월드컵 출전 선수는 나밖에 없다”
전가을에게 대표팀은 항상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어린 시절부터 연령대 대표팀을 거쳤고 20세가 되던 2007년에는 A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아시안게임, 아시안컵, 월드컵 등 나설 수 있는 모든 대회에서 뛰었다. 그는 “삶의 일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수 생활 내내 대표팀과 함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약 1년간 대표팀에서 다소 멀어진 상황이다. ‘세대교체’를 천명한 대표팀은 어린 선수들로 채워졌다. 그는 “좀 떨어져 있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면서 “‘정말 후회 없이 했다’는 감정이 들며 뒤를 돌아보게 됐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에서 도와주신 분들도 많았을 텐데 감사함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더 이상 대표팀에 대한 의지는 없는 것일까. 그는 “마음을 내려놨다면 내가 대표팀에서 스스로 나왔을 것이다. 항상 부상이 있어서 윤덕여 감독님 속을 썩였던 전과 달리 지금은 아픈 곳도 없다”며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10년이 훌쩍 넘는 대표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월드컵이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 가장 큰 대회인 월드컵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영광이었다. 워낙 많은 경기를 치러서 나도 가끔 잊기도 하지만 월드컵만큼은 가슴속에 남아 있다”면서 “모르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나도 월드컵에서 골(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 코스타리카전)도 넣고 16강에도 진출한 선수다(웃음). 지금 소속팀에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는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인 대표팀은 아니지만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나서 대회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그 대회(2009 베오그라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땐 내가 골도 많이 넣었다(6경기 10골)”며 웃었다. 이어 “그때 함께했던 ‘황금세대’ 선수들이 여자축구 최강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멤버는 김도연, 심서연, 임선주, 조소현, 지소연 등으로 최근까지도 우리나라 여자축구를 이끌고 있다.
#‘지도자 전가을’ 기대감
“이제는 선수로서 후반전을 뛰고 있는 것 같다”는 그는 “선수생활 이후 미래에 관한 생각도 종종 한다”고 털어놨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어린 선수들이다. 전가을은 “축구 기술 외에도 내 경험을 편안하게 이야기해주며 정신적 부분에서 성장을 돕고 싶다”면서 “축구는 차근차근 하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서적 부분이나 가치관 등은 한번 엇나가면 돌아오기 어렵다. 그런 부분을 잡아주면 기술적 부분은 얼마든지 성장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 전가을’에 대한 축구계의 기대감도 존재한다. 그는 “어릴 땐 지도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내 이기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가는 분야는 어린 친구들을 돕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전가을은 “선수생활 이후 어린 선수들의 심리 코칭 등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사진=박정훈 기자
그러면서도 전가을은 브리스톨 시티 선수로서 신분을 명확히 했다.
“빨리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돼서 경기에 나서고 싶다. 이제 몸이 완전히 만들어졌으니까 내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 우리 팀 어린 친구들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웃음). 팀이 강등권에서 벗어났지만 더 달아나야 한다. 팀에서 부르는 날까지 준비 잘하면서 기다리겠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