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제훈의 2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사냥의 시간’은 두 차례에 걸쳐 개봉 일정이 미뤄져 ‘비운의 작품’이 될 뻔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사냥의 시간’은 2020년 상반기 기대작이면서 동시에 ‘비운의 작품’이다. 2018년 하반기 촬영을 마치고 개봉 일정을 조율 중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팬데믹(Pandemic·대유행)으로 번진 상황에서 2월과 3월 개봉을 예정한 작품들이 줄줄이 일정을 연기했다. 이 과정에서 ‘사냥의 시간’은 영화관이 아닌 넷플릭스 행이라는 새로운 선택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만 순탄치는 않았다. 해외 판매를 대행하던 업체와 계약 분쟁이 일었고 국외상영금지가처분까지 인용되면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겨우 갈등이 봉합되고 나서야 당초 개봉 일정에서 2개월이나 밀린 4월 23일 공개됐다.
“넷플릭스가 없었으면 어떻게 생활했을까” 넷플릭스의 팬을 자처한 이제훈. 사진=넷플릭스 제공
이제훈은 ‘사냥의 시간’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한탕을 노리는 ‘준석’ 역으로 분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들을 범죄에 가담시킬 정도로 무모하고 대책 없으면서도, 따뜻한 남쪽 섬에서 작은 가게를 차리고 평온하게 살고 싶다는 것만이 삶의 희망인 양면적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내일이 없는 청년들이 단순하고 소박한 희망을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는 모습은 ‘사냥의 시간’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뿐 아니라 현재의 사회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투영될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을 연기할 때는 죽음을 맞닥뜨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공포감과 괴로움에 초점을 맞췄어요. 윤성현 감독도 촬영 전 제게 ‘이전까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야,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더라고요. 실제로도 그랬어요. 내 곁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경험이 제 인생에서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그런 걸 현장에서 매번 느끼니까 정신적으로 좀 많이 피폐해지더라고요. 속으로 ‘도망가고 싶다’ ‘내가 뭐하자고 준석을 연기하고 있지’ 하면서(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았던 건 작품을 완성해 가는 그 과정에서 ‘빨리 이 작품을 사람들에게 경험시켜주고 싶다’는 열정 덕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번 작품에서 이제훈은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했다. ‘파수꾼’에서 만나 “영화적 동지”라고 칭할 정도로 가까워진 윤성현 감독도 그렇지만, 상수 역의 박정민이나 총기밀매상 역의 조성하와도 다시 한 번 합을 맞출 수 있었다. 촬영 현장이 아니라 동창회 같은 느낌이 들었을 터다. 한 명 한 명을 꼽아가며 긴 이야기들이 흘러 나왔다.
“‘사냥의 시간’은 윤성현 감독이 ‘파수꾼’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잖아요. 그 시간 동안 영화적인 이야기를 엄청 많이 나눴어요. 오랜 시간 저의 ‘영화적 동지’가 돼 준 사람이죠. ‘파수꾼’이 없었다면 내 배우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제게는 중요한 작품이기도 해요. 이처럼 배우로서 베이스를 형성하고 굳건한 뿌리를 내리는 데 윤 감독이 중요한 존재를 맡아줬어요. 이제 두 번째 작품을 찍는데도 불구하고 윤 감독은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졌더라고요(웃음).”
이제훈은 윤성현 감독과 배우 박정민, 조성하 등 ‘파수꾼’에서 함께했던 이들과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극중에서 이제훈이 맡은 준석은 장호(안재홍 분), 기훈(최우식 분), 상수(박정민 분) 사이에서 리더 격이면서도 수직이 아닌 수평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마지막까지 그가 바랐던 소박한 희망이 온전히 자기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도 함께 누리고 싶은 꿈이었다는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문득 시궁창 같은 삶 속에서도 희망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린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 궁금해졌다.
“최근 사회를 보면서 그런 걸 느껴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 자체가 위대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결집과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는 걸 보며 매번 희망을 보는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힘들긴 하지만 희망을 갖고 사는 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으로 가는 방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냥의 시간’에서도 세 친구들을 ‘빨리 벗어나, 도망가’ 하면서 응원해주고 싶었죠.”
‘사냥의 시간’ 속 준석은 유토피아에 도달했지만 또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어쩌면 마지막에 이르러 안주하는 것은 그에게 희망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우로서 이제훈이 바라본 희망과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많은 사람들이 저를 봐 주시고 즐겨주시는 그 순간이 제게는 유토피아인 것 같아요(웃음).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지라도 저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한 일이거든요. 나중에 돈을 엄청 많이 벌고, 저처럼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시네마 극장을 만들어 영화를 보고 GV(Guest Visit, 관객들과 대화) 같은 시간을 많이 가진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누가 저한테 ‘부자가 될래, 배우로 평생 살래’ 하면 전 배우가 좋거든요. 그렇게 계속 영화를 하고 꿈을 꾸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