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후반기, 피할 수 없는 생존 싸움이 시작된다. 핵심은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권 잠룡의 관계설정이다. 양측이 전략적 제휴를 통해 ‘원팀’을 가동하면, 정권 재창출 문으로 바짝 다가선다. 반대로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당선자가 전략적 동거에 실패할 땐 여권은 권력투쟁 소용돌이에 빠진다. 결말은 둘 중 하나다. 민주 정부 4기의 문을 열든, 잃어버린 5년을 허용하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숨은 정치학이 문재인 정부 운명을 가르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당선자가 악수하는 모습. 사진=청와대 제공
집권 4년 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의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은 이전 정권 투톱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현재 권력도 미래 권력도 역대급’이다. 5월 10일로 취임 3년을 맞은 문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가장 높은 국정 지지도로 임기 후반기를 시작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한국갤럽’이 5월 1일(4월 28∼29일 조사·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공개한 지표를 보면 문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64%로, 코로나 사태가 발발한 1월 5주 차(41%) 대비 23%포인트(p)나 뛰었다.
‘한국갤럽’의 역대 대통령 3년 차 4분기 지지도는 이명박(MB) 47% > 박근혜 43.0% > 김영삼(YS) 32.0% > 김대중(DJ) 30.0% >노태우 25.0% > 노무현 23.0% 순이었다. 4·15 총선 후 터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미투(나도 당했다) 파문과 양정숙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자 부실 검증 논란 등으로 최근 문 대통령 지지도 상승 추세는 한풀 꺾였지만,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다.
2016년 총선을 시작으로, ‘2017년 대선→2018년 지방선거→2020년 총선’으로 이어진 총 4차례 선거에서 승리한 것도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가 한몫했다. 전국 단위의 4연속 선거 승리는 헌정사상 처음이다. 여의도에선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었다면, 문 대통령은 ‘선거의 왕’”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미래 권력도 마찬가지다. 4·15 총선을 실질적으로 이끈 당의 원톱은 친노(친노무현) 좌장 이해찬 대표가 아닌 이낙연 당선자였다. 친문(친문재인)계든 비문(비문재인)계든 “이낙연 프리미엄이 정권도 당도 살렸다”라고 입을 모았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이 당선자가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줄곧 15∼20%p 이상 앞선 것이 주효했다”며 “이낙연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최소 20석 이상은 날아갔을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 승리 직후 이 당선자는 ‘컨벤션효과(정치적 이벤트 후 지지도가 상승하는 현상)’를 오롯이 받았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총선 직후인 4월 28일 공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4월 20∼24일 조사)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전달 대비 10.5%p 오른 40.2%를 기록했다. 반면 패자인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같은 기간 13.4%p나 하락한 6.0%에 그쳤다.
이낙연 당선자의 컨벤션효과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을 크게 웃돈다. 이 당선인이 명실상부한 포스트 문재인의 원톱으로 부상한 것이다. 야당 내부에선 “대선이 2년이나 남은 현재 지지도는 인지도 조사”라며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폄하했지만, 내부에선 5연속 패자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하다.
5월 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회 비상경제대책본부 간담회에 참석한 이낙연 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을 둘러싼 생존 싸움이 문재인 정부 후반기 분수령으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 후반기 역대급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생존 싸움은 기존의 여의도 문법을 뒤흔들었다. 집권 후반기 땐 통상적으로 ‘대통령 레임덕(권력누수) 징후 포착→차기 대권 잠룡의 당·청 거리두기→대선 레이스 조기 점화→당 내부 극한 권력암투’의 악순환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역대 어느 정권도 예외 없이 이 굴레에 갇혔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당·청은 전례 없는 전국 단위의 4연속 선거 승리로, 내부 갈등 시점을 뒤로 늦췄다.
과거 2인자 존재감을 훌쩍 뛰어넘은 이 당선자가 청와대와 각을 세우지 않은 점도 당·청 분열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당선자가 국무총리 시절부터 대망론을 형성하자, 정치권에선 ‘국무총리 잔혹사’가 회자되며 평가 절하하는 기류가 역력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33년간, 역대 정부의 국무총리들이 대권 9부 능선에서 어김없이 낙마한 것을 두고 이 당선자에게 ‘국무총리 불가론’의 덫을 씌웠다.
여권 한 관계자도 “부처의 장관 출신 대통령과 광역자치단체장 출신 대통령은 배출됐지만, 국무총리만은 예외였다”며 “2인자 이미지가 대권을 가로막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32대 서울시장을 각각 지냈다.
하지만 이 당선자는 국무총리 대세론 때마다 거론되는 3인방인 ‘김종필(JP)·이회창·고건’ 전 국무총리와는 결이 다르다는 평가다. 이 당선자는 3김의 한 축이자, 두 번의 국무총리를 지낸 JP보다는 정치 급수가 낮다. JP는 9선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 당선자는 이번 총선을 통해 5선 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JP는 단 한 번도 40%대 지지도를 갖지 못했다. 87년 체제 이후 JP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전략적 제휴를 맺었던 YS와 DJ에게 각각 팽당한 것도 낮은 지지도가 결정적이었다. 충청이라는 공고한 지역 기반은 있었지만, 낮은 대중성이 대권 9부 능선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든 셈이다. 이 당선자는 이번 총선을 통해 호남 대통령론에도 다시 군불을 지폈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 전 총리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감사원장 등을 지낸 한국 최고의 엘리트였다. 동아일보 출신에 전남도지사를 지낸 이 당선자보다 경력 면에선 이회창 전 총리가 한 수 위다. 카리스마 리더십도 이회창 전 총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국무총리 시절 YS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러나 반골 이미지는 대선에 독으로 작용, 외연 확장을 막았다. 이회창 전 총리가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것도 중도 외연 확장 실패와 무관치 않다.
이회창 전 총리가 2017년 8월 22일 회고록 출판 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박정훈 기자
이낙연 당선자도 ‘사이다 총리’, ‘촌철살인’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이를 시너지효과로 승화할 합리적인 리더십을 갖췄다. 이 당선자는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받는 고 전 총리 못지않은 추진력도 있다. 특히 이 당선자가 고 전 총리와는 달리, 당에서 꾸준히 성장한 대권 주자라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고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처럼 반대편의 파상공세에 권력의지를 단번에 접을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 총선 대승을 이끈 이 당선자의 대권 행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JP·이회창·고건 3인방의 강점인 ‘지역 기반(호남과 수도권)’, ‘강한 리더십’, ‘추진력’ 등의 3박자를 오롯이 갖췄다.
관전 포인트는 당·청 투톱이 균열하는 ‘시점’이다. 이낙연 프리미엄에 깔린 핵심 축은 ‘호남 대통령론’이다. 민주당이 4년 만에 호남에서 싹쓸이(28석 중 27석)한 기저에는 지역 유권자들의 열망이 깔렸다. 수도권 121석 중 103석을 차지한 것도 수도권의 호남 유권자들이 똘똘 뭉친 결과로 풀이된다. 비문(비문재인)계인 이 당선자가 친문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총선을 압승으로 이끈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도 호남 지역 기반 덕에 가능했다. 낙선한 박지원 민생당 의원이 “호남 대통령 만들기에 역할이 있을 것”이라며 정계은퇴에 선을 그은 것도 이 당선자를 염두에 둔 것이란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 당선자의 딜레마다. 그간 민주당 대선 경선을 관통했던 키워드는 ‘호남 후보 필패론’이었다. 여기엔 영남 출신 후보가 부산·울산·경남(PK)과 대구·경북(TK) 표를 갈라치기해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렸다. 민주당이 배출한 3명의 대통령 중 DJ만 호남이다.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PK 출신이다.
변수는 포스트 없는 친문계의 최종 선택이다. 친문 직계도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는 내년이면, 포스트 문재인을 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문 대통령 참모그룹과 당내 친문계가 ‘이낙연 필승론’과 ‘이낙연 불가론’으로 나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때 당·청 투톱이 엇박자를 내거나, 이 당선자와 친문계가 충돌하면 여권의 레임덕은 시작된다. 레임덕 입구 단계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광역자치단체장과 정세균 국무총리 등이 본격 등판할 경우 문재인 정부의 레임덕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당·청 투톱 관계설정의 1차 분기점은 민주당 차기 당권이다. 문 대통령이 4월 17일 청와대로 이 당선자를 초청해 총선 승리를 격려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청와대가 당권 도전에 힘을 실어준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친문계 내부에선 이와 관련해 “이 당선자 측이 흘린 게 아니냐”며 냉소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 당선자의 자기 정치에 대한 당 주류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친문계와 이해찬계 일각에서도 긍정적인 ‘이낙연 추대’를 통한 임시 지도부 구성이 현실화해도, 포스트 대선을 둘러싼 내부의 권력암투를 늦출 뿐 막을 수는 없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