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미 ITC의 최종판결을 앞둔 SK이노베이션이 최근 미국 배터리 제2공장 증설을 위한 현금출자를 공시하면서 재계의 시선이 쏠린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 본사. 사진=연합뉴스
2019년 4월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먼저 승기를 잡은 것은 LG화학이다. ITC가 지난 3월 21일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소송제기 전후로 증거를 인멸했다”며 조기패소를 요청했다. 요청서에는 해외근무 중인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 건설 관련 부서 팀장 A 씨가 팀원들에게 ‘각자 경쟁사 관련 자료를 삭제하라’고 보낸 이메일 등이 증거인멸의 근거로 제시됐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이 소송을 인지한 2019년 4월부터 증거 보존 의무가 발생함에도 불구, 소송 관련 문서에 대해 의도를 가지고 삭제하거나 삭제하도록 방관했다고 판단해 LG화학의 조기패소 결정 요구를 수용했다. ITC는 이후 SK이노베이션의 재검토 요청도 수용했다. ITC는 조기패소 결정 4주 만인 지난 4월 17일 ‘전면 재검토(in its entirety)’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련 업계에서는 ITC의 전면 재검토 결정을 통상적인 절차로 해석했다. 그간 소송 당사자가 요청한 재검토가 모두 수용됐으나 결과가 바뀐 사례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패색이 짙었던 SK이노베이션의 생각은 달랐다. ITC가 재검토 신청 건수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면 재검토’라는 표현을 쓴 데다, ‘공익(public interest)’을 고려해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위원회 구성원 5명 전원이 동의한 것 또한 SK이노베이션에게 긍정적인 시그널로 읽히고 있다. ITC는 소송 당사자가 예비결정에 대해 재검토를 요청할 경우, 위원회 구성원 가운데 한 명만 동의해도 재검토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이 요청한 재검토 건의 경우 전원이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일각에서는 LG화학이 ITC에 제시한 SK이노베이션 내부 이메일 자료가 일부 누락된 왜곡된 자료라는 지적도 제기된 상황이다. SK이노베이션 상황을 잘 아는 한 재계 관계자는 “LG화학이 주장한 증거인멸 정황이 ITC가 조기패소 결정을 내린 결정적 근거였고, SK이노베이션이 이메일 원본을 확인하고 반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재검토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SK이노베이션은 여기에 의미를 둔 것 같다“전했다.
SK이노베이션이 최근 미국 제2공장 증설 계획을 밝힌 것 역시 재검토 수용에 따른 후속 조치로 해석된다. ITC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다. 앞서의 재계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하게 되면 미국 내에 증설 중인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며 “코로나19 여파로 고용이 급감한 미국의 현재 상황에서 일자리를 만들어주며 ITC에 ‘한쪽 편만 들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가 결정될 때부터 해외투자가 소송의 마지막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는 SK이노베이션의 투자는 경제분야의 중요한 사안 중 하나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ITC 결정에 비토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미국 조지아주 제1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 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SK이노베이션이 패소로 인해 최대 시장인 미국을 잃게 되면 미국 내 공장 또한 정상적인 가동이 어려울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공장은 LG화학과의 소송전 시작 전인 2019년 2월 착공, 오는 2022년 완공될 예정이다. 공장이 설립되면 1만 명 규모의 일자리 창출이 예상된다.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는 것을 공약으로 삼았던 트럼프 정부는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주 공장을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ITC측에 재검토 결정을 내리며 요구받은 자료들을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공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등의 자료를 제출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ITC 전원이 모두 동의해 재검토를 밝힌 만큼 얼마나 SK이노베이션이 얼마나 상황을 잘 설명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지금까지 예비결정 결과가 바뀐 케이스는 거의 없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 등의 변수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 1분기 사상 최악의 실적을 냈지만 투자 의지는 분명하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 1분기 매출은 11조 1629억 원,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은 각각 1조 7751억 원, 1조 5521억 원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실적 악화에도 불구, 재무구조가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며 배터리 부문 투자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배터리 부문은 자본투입 기간이 긴 사업”이라며 “매년 배터리 부문에 2조 원가량을 투자했고, 이번에 투자를 결정한 미국 2공장의 경우 내년과 2023년에 예정된 투자 금액을 집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배터리 공장 건설에만 장기적으로 총 50억 달러(약 6조 1200억 원)까지 투입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집행이 확정된 투자금은 총 3조 원이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은 공식적으로 미국 공장 증설 계획과 관련해 ITC 소송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미국 공장 증설은 고객사와의 약속을 위해 진행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더불어 LG화학과의 ITC 소송에 대해 “ITC가 검토 중인 상황이라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