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 오전 일찍부터 이재용 부회장의 ‘입’에 이목이 집중됐다. 앞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지난 3월 이 부회장에게 △경영권 승계 △무노조 경영 △시민사회 소통 문제를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기한은 5월 11일까지였지만 7일 준법위 정례회의가 예정돼 있어 이날 이 부회장의 사과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았다. 삼성은 오전 중엔 사과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다가 정오에 맞춰 이 부회장이 기자들 앞에 선다고 알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6일 입장 발표를 앞두고 연단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고개 숙이며 삼성의 미래 말한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았다. ‘경영권 승계’ 논란이 문제였다. 그는 현재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재판을 받고 있고,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에선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있다. 두 사건 모두 경영권 승계 논란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공식석상에 서더라도 재판과 수사에 영향이 미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과보다는 포괄적인 반성과 향후 재발 방지에 대한 의지를 말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관측했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로 알려졌지만, 삼성은 기자단에 보낸 문자부터 이 부회장이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사과’ 대신 ‘입장 발표’라는 표현을 썼다. 이 부회장 역시 “저와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승계 문제에서 비롯된 게 사실”이라며 “제 잘못입니다”라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지만 어떤 잘못을 했는지, 또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10분가량의 입장 발표 시간의 절반을 지금까지의 소회와 삼성의 미래, 비전 제시 등을 언급하는 데 할애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와 관련해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최종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입장 발표 이후 “적어도 ‘논란이 불거진 것에 대한 사과’보다는 한 발 더 나갔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08년 삼성 특검에 참여했던 한 변호사는 “승계 문제는 재판과 검찰 수사 탓에 신중할 필요도 있고, 지금의 삼성이나 이 부회장 입장에선 줄기를 따라가 보면 이건희 회장과 그 측근들로부터 시작됐던 일이니 억울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다만 지적을 받았던 부분에 대한 책임 소재와 재발 방지 대책 등에 대해 보다 명확한 입장을 냈다면 지금처럼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이 다소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꺼낸 카드는 예상 밖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국내 10대그룹 가운데 단 한 곳도 혈연 승계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만큼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총 3차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그러나 4세 경영 포기 발언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온다. 과거와 현재의 문제에 대한 인정은 건너뛰고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다짐과 약속으로 화제를 전환했다는 취지다. 카카오뱅크 경영자 출신의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경영권 이양할 권한은 주주에게 있다”며 “이 부회장에게는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할 권한 자체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재계 긍정적 반응, 준법위는 “의미 있다” 평가
반대로 재계 안팎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지난 6일 오전 내내 인사, 법무팀에서 올라온 초안을 직접 다듬거나 다시 썼다고 한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표현에 대해 임원들이 만류했지만 이 부회장이 직접 설득해 입장문에 담았다는 후문이다.
대기업 법무팀 소속으로 일했던 한 변호사는 “입장문을 보면 법을 어기는 일, 편법에 기대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있다. 법무팀은 재판과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이런 표현은 최대한 쓰지 않으려 한다. 이 부회장이 과거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4세 경영 포기 발언에 대해선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삼성의 새 미래를 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해석한다. 이 부분은 사과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삼성 준법위는 지난 5월 7일 정례회의를 열고 이 부회장의 대국민 입장발표와 관련한 위원회 입장을 논의했다. 준법위는 이날 “이 부회장의 입장 발표를 의미있게 평가한다”고 했다. 이어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에 조만간 보다 자세한 개선방안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달라질 삼성의 모습은?
입장 발표대로 실행된다면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을 끝으로 가족 경영 체제의 막을 내린다. 삼성은 물론 국내 주요 그룹들의 혈연 승계와 강력한 오너 일가의 권력을 늘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 가운데 재계 서열 1위 삼성이 가족 경영을 포기한다면 재계에 미치는 파장도 클 수밖에 없다.
삼성은 앞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6년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저보다 더 훌륭한 경영인이 있으면 언제든 경영권을 넘기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3명의 최고경영자가 핵심 사업을 이끌고 있다. 이 같은 체제가 향후 삼성그룹 전 계열사로 확대될 수 있다.
이사회 활동도 더욱 강화될 방침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앞으로는 이사회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최근 수년 사이 이사회 중심 경영체제를 추진해왔다. 2018년 3월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했고, 지난 2월엔 창립 이래 최초로 사외이사에게 이사회 의장직을 맡겼다.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 대한 영향도 관심사다. 삼성은 재판부의 주문대로 준법위를 만들고, 준법위는 이재용 부회장의 반성과 사과를 권고했다. 이 부회장은 입장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삼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안팎의 평가가 어떻든 삼성과 이 부회장은 재판부가 낸 숙제를 모두 제출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사과한다고 그대로 감경하면 애초에 재판을 할 이유도 없다”면서도 “다만 재판부가 요구한 것들을 이행한 점은 피고인(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참작될 수 있다. 참작 범위가 얼마나 될지는 오롯이 재판부의 결단에 달렸다”고 말했다.
변수도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재판부의 준법위 설치 요구는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기 위한 일이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법관 기피신청을 냈다. 서울고검은 이를 기각했지만 특검이 대법원에 재항고하면서 재판은 4개월째 공전 중이다. 파기환송심이 진행되려면 기피신청 결과부터 나와야 한다. 대법원은 지난 5월 7일 기피신청 재항고 사건을 2부에 배당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조만간 이재용 부회장을 소환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검찰은 지난 4월 말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대표, 이영호 삼성물산 대표,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 등 핵심 임원들을 재차 소환해 조사를 진행했고, 과거 미래전략실 임원들도 소환했다. 현재로선 남은 수사 대상은 이 부회장뿐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 소환 여부에 대해 “현재로선 확인해 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