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하지 않기, 마스크 쓰고 다니기, 큰 모임은 하지도 가지도 않기, 가능한 한 작은 모임도 나가지 않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기, 재택근무가 가능한 경우 재택근무 하기. 보이지 않는 코로나19가 바꾼 삶의 풍경은 일순간에 보이는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삶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그러나 이제 알겠다. 여유가 있을 때 구경거리로 본 작품은 삶이 아니라 오락이었음을. 현실이 되니까 오락이 바로 전쟁이 된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하는 기막힌 전쟁이. 그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태원발 비극이 시작되었다. 쌓기는 어렵고 무너뜨리기는 한순간이라더니,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 빠지는 일인가. 그래도 그 방법밖에는 없다. ‘페스트’의 리유와 타루가 그랬던 것처럼.
까뮈의 ‘페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돌연 낯설어진 어떤 도시의 소음에 놀라 문득 잠을 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리의 상황, 세계의 상황과 맞닿아 있는지.
주인공은 역시 리유다. 그는 진단만 가능하지 치료법이 없는 전염병 페스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의사다. 그가 또 다른 주인공 타루와 연대하여 질병과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장면은 우리의 대응팀 같다. 그들은 페스트 사태가 선포되어 밖으로는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오랑시에서 보건대를 조직해서 예방만이 살길이라며 예방활동을 펼친다. 그래도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결국은 타루까지…, 그 대목에서는 참 짠했었다. 스페인 총리가 코로나19와 싸우다 죽어간 의료진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며 울먹일 때 그 대목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의사인데 치료할 수는 없고 그저 예방뿐인 힘 빠지는 싸움인데, 그래도 리유는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싸움을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죽기 싫어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볼 수만은 없어서.”
페스트가 퍼지자 그 평등한 전염병에 경직된 해석을 붙이는 파늘루 신부의 막말도 기억에 남는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처럼 페스트 역시 신이 악인에게 내린 재앙이라며, 올바른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는 신부! 그 신부가 무구한 아이의 죽음을 보고 바뀌는 대목도 놓칠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처럼 위협을 받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느끼는 존재감이 없었던 인물 코타르도.
페스트가 번지고 있는 오랑시에서는 아무리 ‘빽’을 써도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들어오는 것은 가능하다. 이별이 아픈 사람들 중에 누가 들어왔을까. 유일하게 오랑시로 들어온 인물은 너 없이는 못 산다며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젊은 커플이 아니라 무덤덤하게 살아온 노부부였다!
그렇듯 ‘페스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까뮈는 정말 그 사람의 심리를 잘 추적했다. 그는 ‘페스트’에서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놓여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이상하다. 페스트의 그 말이 왜 계속 귓속을 맴도는지 모르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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