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평안남도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4월 21일 미국 CNN은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보도했다. 많은 북한 전문가와 소식통들은 김정은의 심혈관계 시술·수술설에 무게를 실었다. 최고지도자를 향한 국내외 언론의 각종 추측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북한은 5월 2일에서야 입을 뗐다. 이날 북한 관영매체들은 일제히 김정은의 평안남도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 참석 사실을 보도했다. 온갖 추측성 루머를 낳았던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불식시키는 행보였다. 김정은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김정은 건강상태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4월 말부터 청와대와 통일부는 꾸준히 “김정은과 북한에 특이 동향이 없다”고 밝혀왔다. 국정원은 5월 6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현안보고를 통해 일각에서 불거진 김정은의 심혈관계 시술·수술설을 일축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브리핑을 통해 “적어도 (김정은이) 심장 관련 시술이나 수술을 받은 것은 없었다고 판단한다”는 국정원의 보고 내용을 전했다.
청와대와 정부를 비롯한 정보기관은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일축했고, 곧이어 김정은이 컴백했다. 4월 말 메가톤급 이슈로 부상했던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둘러싼 빅마우스들의 추측은 대부분 ‘가짜뉴스’로 전락했다. 김정은 건강 상태와 관련해 “김 위원장이 스스로 일어나거나 걷지 못하는 상태”라고 주장했던 태영호(태구민)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와 “김정은이 사망했을 확률은 99%”라고 단언했던 지성호 미래한국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여당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두 당선자는 대국민 사과를 했다.
태영호 미래통합당 당선자와 지성호 미래한국당 당선자. 사진=박은숙 기자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친 뒤 ‘김정은 이슈’는 잠잠해졌다. 일각에선 “5월 1일 깜짝 등장을 계기로 김정은의 공개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전망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단 한 번의 쇼케이스를 거친 뒤 다시 사라졌다. 5월 1일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친 김정은은 5월 20일 기준 20일 동안 공개 활동을 멈춘 상태다. 그의 행보는 오리무중이다. 북한 소식통들 사이에선 “5월 1일 이후 김정은이 공개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서 “오히려 4월 ‘건강이상설’이 불거졌을 때보다 더 긴 잠적에 돌입한 상황”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 가운데 북한 내부에선 적잖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월 17일 “북한이 최근 몇 달간 권력 남용 및 부패 등을 이유로 김 위원장 개인 경호원, 정보기관 수장, 정치·군사 분야 고위직 인사를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WSJ는 한국 관료와 평양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순천)비료공장 준공식을 첫 행보로 선택한 것은 외교 문제보다 국내 현안을 의식한 행보”라고 전했다.
WSJ는 “북한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국경 폐쇄로 최대 지원국인 중국과의 무역, 관광사업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안보문제 전문가로 알려진 코트랜드 로빈슨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WSJ 인터뷰에서 “북한 주민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면서 “북한 주민들은 식량·약품 부족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WSJ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이 5월 1일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 시점을 전후로 북한 지도부는 내부 민심 챙기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북한 소식통은 “내부 인사 단행과 더불어 북한 지도부의 방향성이 전환됐다”고 분석했다. 이 소식통은 “그간 외교 협상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던 북한이 내부 다지기에 본격 돌입했다”면서 “이러한 조치 이면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국제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여기다 내부적으로 다른 속사정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정은이 5월 1일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한 뒤 다시 한번 잠적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순천인비료공장 준공 테이프를 자른 뒤 다시 20일 동안 공개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김정은. 사진=연합뉴스
이 소식통 말처럼 5월 2일 이후 북한 관영매체 보도에서 김정은은 다시 사라졌다. 그 가운데 5월 6일 영국 더선은 노동절에 등장한 김정은이 ‘대역’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마치 영화 ‘광해’ 속 광해군처럼 “김정은과 닮은 인물을 김정은인 것처럼 등장시켰다”는 추측이다. 더선은 2020년과 2013년 김정은의 사진을 비교하며 머리 라인과 눈꼬리 주름, 코와 치아를 분석하며 대역설이 제기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복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 대역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대역설을 일축했다.
중국에 거주하는 북한 소식통은 “북한 관영매체에 등장한 김정은은 진짜가 맞을 것”이라면서 “김정은의 5월 1일 깜짝 등장은 ‘면피용 대외선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김정은의 건강상태와 별개로 최고지도자를 둘러싼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이 북한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라면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최대 국경일 중 하나인 노동절을 ‘최고지도자 복귀 무대’로 삼아 국제사회에 김정은의 건재함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덕붙였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선 ‘김정은이 심혈관계 시술이나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끊이지 않는 양상이다. 앞서의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이 5월 1일 일회성으로 등장한 뒤 다시 장기간 잠적에 돌입한 것은 건강상 회복을 염두에 둔 조치일 것이란 추측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귀띔했다.
5월 2일 노동신문의 김정은 보도에 대해선 “김정은이 5월 1일 공식석상에 등장했다는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가 4월 초 미리 완성된 그림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5월 2일 노동신문이 보도한 김정은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 참석 기사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고 했다.
김정은이 참석한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이 5월 1일이었다는 점이 부각된 장면. 사진=연합뉴스
그는 “기사 내용에 김정은의 준공식 참여 날짜를 표기했는데, 여기서 ‘주체’라는 연호가 빠졌다”면서 “이날 행사가 ‘사전 촬영된 행사’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주체는 김일성이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햇수를 세는 북한의 연호다. 2020년은 주체 109년이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노동신문이 그간 김정은의 현장 지도를 보도하면서 ‘주체’라는 연호를 붙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면서 “이례적이면서 수상쩍은 부분이 있지만, 뭐라고 확언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노동신문이 김정은 현장지도 날짜·시간을 설명하면서 연호를 미표기한 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북한 당국의 트릭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처럼 김정은이 다시 자취를 감추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여러 추측들이 다시 난무하고 있다.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 역시 현재 진행형이라는 설도 그중 하나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5월 20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김정은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북한 내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김정은이 심혈관계 수술을 받은 건 사실이다. 다만 건강이상설이 와전돼 ‘김정은이 죽은 것 같다’는 사망설로 이어진 게 과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 대표는 “5월 1일 김정은이 등장한 뒤 20일 동안 또 자취를 감췄는데, 지금은 왜 나타나지 않는 건지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김정은이 정상일 경우엔 가만있을 성격이 아니다. 그동안 김정은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가 공식 석상에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은 경우는 아팠을 때였다. 아프지 않은데 이토록 오랫동안 공개 활동을 꺼린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