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나은행에서 판매된 ‘이탈리아 헬스케어 펀드’는 투자자 400여 명에게 1100억 원 어치가 넘게 팔렸다. 이탈리아 병원들이 지역 정부에 청구할 진료비 매출 채권에 투자하는 상품이다. 글로벌 운용사들은 병원들로부터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지방정부에서 상환받아 수익을 올리는 구조의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데, 9개로 구성된 이 펀드는 미국계 자산운용사 CBIM이 만들고 국내 운용사들이 하나은행 PB센터를 통해 사모 방식으로 판매했다. 최소 투자금액은 1억 원이었다.
하나은행이 VIP 고객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사진=일요신문DB
일부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연 5% 수준”이라는 PB들의 말을 믿고 투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정성을 중시해 펀드보다 예금이나 적금 등을 찾는 고액자산가들에게 “이탈리아 정부가 파산하지 않는 한 원금손실이 나지 않는 매우 안정적인 상품”이라며 투자를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 펀드 실사결과 9개 펀드 중 4개 펀드는 투자금의 57%, 다른 4개는 58%만 남은 상황이다. 한 펀드는 투자금액의 39%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년여 만에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하나은행은 부랴부랴 원인 파악에 나섰다. 펀드 실사 결과를 정리한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 펀드는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우선 단기채권 위주로 운용할 계획이라던 펀드에 장기채권이 편입됐다. 이로 인해 판매할 당시 고객들에게 13개월이면 조기상환 가능하다던 펀드는 5년 이상 원금상환이 지연될 상황에 처했다. 더구나 이 장기채권을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매입한 정황도 발견됐다.
하나은행은 투자자들에게 서둘러 배상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 안은 실사 결과 남아있는 투자금(평균 55% 수준)에 은행이 손해배상금을 더해 총 투자금의 75%가량을 보상하는 안이다. 두 번째 안은 현재 시점으로 추정되는 회수금액을 가지급해준 뒤 나중에 펀드 회수 시점에 정산하는 방안으로, 10억 원을 투자했을 경우 5억 5000만 원 정도를 되돌려 받는 방식이다.
운용사도 아니고 판매사에 불과한 하나은행 입장에서는 고심해서 내놓은 방안이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개미 투자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보상안을 접한 투자자들 중 일부는 거부 의사를 밝힌 뒤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법적책임을 묻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하나은행에서 판매 당시 원금손실 가능성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설명했고, 펀드 운용과 관련된 설명도 달랐다며 불완전 판매가 아닌 ‘사기 판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상품제안서에 채권이 어디에 투자됐고 무슨 목적으로 편입돼 얼마의 손실이 났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회계법인 실사자료를 공개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채권 고가매입’에 관한 의혹이 해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은행이 투자자들에게 제공한 헬스케어 펀드 상품제안서에 따르면 의료비 매출 채권의 경우 사설의료기관과 계약을 맺고 할인해서 매입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하나은행 측에서 요약한 회계법인 실사자료를 근거로 부실의 원인이 되는 장기채권을 시장할인율(15~25%)보다 높은 가격(평균 7~8% 할인율 적용)에 매입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부실 원인인 상환 스케줄 지연에 관해서도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 의료채권의 경우 상환 기간은 2019년 1월 기준 평균 114일이다. 하지만 실사 요약 결과에서 손실 원인으로 파악된 장기채권의 예상 상환 만기는 2025~2026년으로 전해졌다.
하나은행은 일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펀드 손실에 대한 설명회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전체 설명회를 개최하지 않는 점, 회계법인 실사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하나은행은 “회계법인과 계약관계 상 실사보고서를 공개할 수 없게 돼있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또 “그동안 투자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한 적도 없어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하나은행을 당황스럽게 하는 점은 투자자들이 하나은행이 처음부터 펀드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자산운용사 여러 곳을 끌어들인 이른바 ‘OEM 펀드’로 의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시장법상 펀드의 운용과 기획은 자산운용사가, 판매는 증권사와 은행 등 판매사가 하도록 분리돼 있다. 이와 반대로 판매사가 처음부터 상품을 기획해 자산운용사에 펀드를 만들도록 한 상품을 ‘OEM 펀드’라고 부른다. 최근 금융권을 넘어 정치권 공방으로까지 번진 라임펀드가 OEM펀드로 의심받는 대표적인 사례다.
투자자들은 펀드 계약을 취소해달라는 민사소송은 물론 사기 등 형사책임을 묻는 소송에 돌입했다. 금융권은 상품설명서나 PB들의 설명과 달리, 실제로는 장기채권 등 부실 자산이 포함돼 있는 것을 하나은행이 인지한 상태였는지가 사기죄 성립의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알고도 팔았다면 형법상 ‘기망’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금융권은 하나은행의 대응방식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해당 펀드 투자자 중 일부는 원금손실 자체도 문제지만 ‘왜 설명 들었던 것과 다른지’와 ‘내 돈 갖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됐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들일 수 있다”면서 “평생 모은 전 재산 날렸다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고객이 아니라는 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