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은 관계된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재심 청구인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때’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내가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법원에서 스스로 입증해내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수사기관, 그리고 법원은 제 손으로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의무가 생긴다. 여기까지 오면 재심의 ‘목적’은 더 이상 유무죄 선고 여부에만 머물지 않게 된다. 가려졌던 진실이 드러나면 치유와 화해를 할 수 있는, 다시는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재심은 끝이 아니라 진실규명과 화해의 시작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이 최근 첫발을 뗐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는 5월 19일 8차 사건 첫 공판을 열었다. 두 차례의 준비기일을 거쳐 열린 이번 공판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각각 윤 아무개 씨의 무죄 입증 계획을 밝혔다. 그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는지, 갑자기 나타난 진범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 등을 새롭게 발견된 증거와 증인신문을 통해 확인하겠다고 설명했다.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고, 치유와 화해의 기회를 얻기 위한 긴 여정이 이제야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사건 재심이 본격적으로 시작 됐다. 8차 사건 발생 직후 현장 사진. 사진=당시 수사 기록
이번 재심 법정에 선 검찰과 변호인단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경찰관들의 위법행위가 있었고, 유죄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가 조작됐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이 재심에서 입증돼야 과거 법원이 판결문에 새긴 윤 씨의 ‘유죄’를 지울 수 있게 된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이번 공판에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수사기록 일부를 공개하며 앞으로의 입증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일요신문은 양측 주장과 함께 그 기록들을 공개한다.
#경찰의 불법체포와 감금, 그리고 가혹행위
검찰과 변호인단은 경찰이 첫 단추부터 불법으로 끼웠다고 주장한다. 처음 경찰서에 데려오는 방식부터 잘못됐다는 판단이다. 검찰이 재심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당시 수사기록과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관들의 진술 등을 근거로, 1989년 7월 21일 임의동행을 가장해 영장 없이 윤 씨를 체포했고 1989년 7월 28일 정식으로 구속영장을 집행할 때까지 3일 동안 화성경찰서에 감금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감금된 3일은 윤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임의동행으로 경찰서에 온 그는 그 사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검찰과 변호인단은 3일 사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폭행과 쪼그려 뛰기, 앉았다 일어서기, 잠 재우지 않기와 같은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당시 경찰이 윤 씨를 영장 없이 체포했고 3일간 화성경찰서에 감금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사진=검찰이 재심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
윤 씨를 대리하는 박준영 변호사는 이번 공판에서 “당시 수사경찰 중 한 명이 최근 윤 씨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이 경찰관은 2019년 12월 검찰의 8차 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과거 윤 씨를 조사할 때 폭행과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 진술인이 윤OO를 잠을 못자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자백하라고 그렇게 한 것이지요. 문 : 위 진술서를 받기까지의 과정에서, 진술인도 인정하는 것처럼 윤OO의 잠을 재우지 않은 것 이외에도 윤OO에 대한 폭행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 당연히 그랬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문 : 진술인이 “당연히 그랬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 망자에게 책임을 떠넘겨서 미안하긴 하지만, 사실 최OO(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형사, 기자주)이 데리고 나가서 자백을 받는 과정에서 최OO이 윤OO를 때리고 윽박지르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윤 씨는 30년 전 일을 온전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이 잠을 재우지 않았다는 점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수사기록을 보면, 윤 씨의 정신이 희미해지는 3일 동안 그의 ‘자백’만은 점점 선명해졌다.
#허위 작성 조서로 보완한 허점투성이 자백
당시 경찰은 윤 씨로부터 “범행을 했다”는 자백의 뼈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범인으로 특정하기엔 그의 말에 허점이 많았다. 윤 씨는 ‘범행 자백’ 이후에도 범행 과정과 방식, 피해자와 집 구조에 대한 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수사기록 속 윤 씨의 진술을 정리한 조서는 달랐다. 범행 현장의 모습과 비슷했고, 내용도 구체적으로 다듬어져 있다. 윤 씨 진술과 조서의 괴리에 대해 앞서의 경찰관은 검찰 재수사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문 : 위 진술조서의 내용은 윤OO의 진술에 따라 작성된 것인가요. 아니면, 진술인이 최OO 형사(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형사, 기자주)로부터 건네받은 진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인가요. 답 : 제가 포괄적으로 질문하고 윤OO가 상세하게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조서는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최OO 형사가 건네준 진술서와 기존에 있던 수사보고서 내용 등을 바탕으로 하여 제가 조서를 친 다음에 출력해서 윤OO에게 열람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
조사 과정에서 윤 씨와 주고받은 실제 문답을 조서로 작성한 게 아니라, 창작했다는 얘기다. 당시 경찰조사과정에서 작성된 조서는 5개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2회 진술조서를 제외한 나머지 4개를 앞서의 경찰관이 작성했다. 과거 윤 씨의 판결문을 보면, 이 조서들이 ‘유죄의 증거’가 됐다.
#숨진 피해자 아버지 진술도 조작된 정황
조서 조작의 흔적은 윤 씨가 아닌 다른 사건 관계자에게서도 발견된다. 당시 숨진 피해자의 방 출입문 앞엔 좌식 책상이 있었다. 범인은 이걸 밟고 방 안으로 침입했다. 피해자의 아버지 박 아무개 씨의 1988년 9월 16일자 사건 발생 직후 조서를 보면 그는 경찰에 “책상 위에 희미한 운동화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책상 위 족적을 당시 치안본부에서 감정했지만 “족적이 매우 불선명해 문양이 전혀 식별되지 않아 족흔적의 크기 및 그 형상에 대한 감정 불능”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숨진 피해자 아버지의 사건 발생 직후 진술(위)과 경찰 감정서(아래). 사진=당시 수사기록
그런데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후인 1989년 7월 29일자 피해자 아버지의 조서에는 “신발자국이 아닌 맨발자국이었고, 발의 앞부분인 것으로 기억한다”는 내용으로 달라져 있다. 피해자 집 일부를 임차해 살고 있던 세입자의 조서(1989. 8. 2.자)에는 “책꽂이 뒤편 문고리 쪽(책상 아래 좌측)으로 왼쪽발로 생각되는 발가락 3개 엄지, 시지, 중지가 현저하게 디딘 자국이 있었고, 책꽂이 앞쪽(책상 위 우측)에 발뒷꿈치를 디딘 자국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사건 발생 당일 피해자의 아버지가 확인하고 치안본부 감정까지 거친 ‘문양이 불분명한 족적’이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후 갑자기 ‘왼쪽발의 엄지, 시지, 중지를 디딘 자국이 현저히 남은 것’으로 바뀐 것이다.
윤 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후 달라진 피해자 아버지의 진술(위). 추가된 세입자의 진술(아래)은 윤 씨의 왼쪽 발 특징과 비슷하다. 사진=당시 수사기록
다음은 윤 씨의 운동화다. 이번 재심 재판 날짜인 2020년 5월 19일 기준으로 새로 사 신은 지 20일가량 지났다. 오른쪽 신발에 비해 왼쪽 신발의 앞부분이 많이 닳아 있고 뒷부분은 전혀 닳지 않았다. 윤 씨는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지면에 발바닥 전체가 닿지 않고 앞부분만 닳는다. 신발을 끌고 걸을 수밖에 없어 금방 바닥에 구멍이 뚫린다. 그래서 윤 씨는 신발 한 켤레를 두 달, 길어야 세 달밖에 못 신는다. 지면에 닿는 엄지와 검지 발가락엔 굳은살이 박혀 있다.
박준영 변호사는 “당시 경찰이 윤 씨가 걸을 땐 왼발의 앞부분으로 그리고 엄지와 검지(시지)부분이 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왼쪽발가락 3개를 디딘 흔적이 책상에 현저히 남아 있었다고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당시 경찰은 윤 씨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 이후 하루빨리 억울함을 풀어줘도 모자랄 피해자 아버지의 진술까지 조작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 씨 신발과 발가락 사진. 사진=윤 씨 제공
#‘살인의 추억’ 백광호의 손과 윤 씨의 왼쪽 다리
다음은 이춘재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이다. ‘이향숙’ 살인 사건의 현장검증을 하던 날, 범인으로 지목된 ‘백광호’가 현장검증을 위해 경찰서를 나선다. 그런데 서태윤 형사가 뒤늦게 따라 나와 화상으로 인해 붙어버린 백광호의 손을 덥석 잡고 이렇게 말한다. “손가락이 이렇게 붙어서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겠다.”
변호인단은 이 장면을 이번 공판에서 상영하면서 ‘백광호의 손’과 ‘윤 씨의 왼쪽다리’를 비교했다. 영화에서 백광호는 피해자 이향숙을 살해한 뒤 몸을 단단한 매듭으로 결박했다. 그의 손으로는 불가능한 매듭이었다. 8차 사건에서 경찰은 윤 씨가 숨진 피해자의 집에 침입할 때, 담을 넘어서 들어갔다고 했다.
윤 씨는 현장검증 당시 담을 넘는 과정에서 담이 많이 흔들려 형사가 잡아 준 사실이 있지만, 담을 넘었는지 여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담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경찰들이 넘겨주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자신의 불편한 다리로는 혼자 담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사기록 속 현장검증 사진을 보면, 윤 씨가 담장을 넘는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상단에 두 손을 대고 담을 넘으려 팔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담장에 다리를 올려 넘는 과정이 담긴 사진은 없다. 변호인단은 이 사진이 없는 이유는 “윤 씨가 홀로 담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현장 검증 사진 가운데 윤 씨가 담장에 다리를 올려 넘는 과정이 담긴 사진은 없다. 사진=당시 수사기록
#과학의 이름 아래 희미해진 허점들
30년 전, 경찰은 숨진 피해자 박 양의 시신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 10점을 채취했다.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을 통해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음모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음모가 일반적으로 꼬불꼬불한 형태라 구분이 쉽지 않았고, 정확성도 크게 떨어졌다.
경찰은 이때 국과수와 논의해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처음으로 도입한다. 시료에 방사선을 쪼여 각 성분 함량을 측정한 뒤 다른 시료와 동일성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경찰과 국과수는 이 감정법을 통해 윤 씨의 음모와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가 동일하단 결론을 내렸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나온 증거의 힘은 강력했다. 윤 씨의 불편한 다리, 허점투성이의 자백은 감정서에 적힌 각종 성분 ‘수치’와 ‘함량 비교’ 앞에서 희미해졌다. 과거 법원은 이 감정서를 윤 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활용했다.
지난해 12월 8차 사건을 재조사한 검찰은 이 국과수 감정서가 조작됐다고 판단했다. 이번 공판에선 강력한 무죄의 증거가 됐다. 당시 국과수가 다른 사람 두 명의 음모 수치를 윤 씨의 음모인 것처럼 감정서에 썼고, 이들 분석 값의 일부 수치도 임의로 더하고 빼는 방법으로 수치가 유사해지도록 조작했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진실 규명의 시작
검찰과 변호인단이 밝힌 입증 계획 가운데 일부는 이미 지난해 경찰과 검찰의 재수사로 과학적, 법리적으로 입증됐다. 법원에서 증거로서 인정받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들은 앞으로 이어질 공판에서 증인신문 등으로 입증한다는 방침이다. 그밖에 지난해 논란이 됐던 윤 씨의 자필 진술서(관련기사 [단독] ‘불러준 대로 받아쓴 흔적 곳곳에’ 화성 8차 사건 윤 씨 자필 진술서 공개)와 기타 조작 정황 등도 이번 법원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될 예정이다.
다만 한 가지 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8차 사건 재심의 결정적 계기가 된 ‘진범’ 이춘재의 자백이다. 그의 자백 역시 법원에서 인정되기 전까지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 때문에 검찰과 변호인단은 그를 법정에 불러 범행의 실체를 확인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춘재가 2019년 12월 검찰 재수사 과정에서 윤 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억울함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사진=지난해 12월 검찰 재수사기록
박준영 변호사는 이에 더해 이춘재가 자신이 왜 연쇄살인범이 됐는지, 그 이유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던져 줄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아직까지 이춘재를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심증이 형성될 때까지 증인 채택을 보류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재판부는 이번 공판에서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보관 중인 8차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 2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다. 이 체모가 이춘재의 것으로 밝혀지면 윤 씨의 ‘무죄’는 더욱 확실해진다. 체모가 윤 씨의 것이나 제3자의 것이더라도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오히려 이 경우 또 다른 조작의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게 변호인단의 주장이다.
검찰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체모와 윤 씨의 모발을 각각 채취해 다음 기일까지 압수물과 압수 조서를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재판부는 이후 감정기관을 선정해 감정을 의뢰한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