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합병에 적극적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이번엔 화장품을 신사업으로 선택했다. 정지선 회장이 2018년 11월 서울 강남구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열린 현대백화점면세점 무역센터점 오픈 기념 행사에 참여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 한섬은 ‘클린젠 코스메슈티칼’(클린젠) 지분 51%를 인수했으며 화장품 사업에 10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라고 지난 12일 공시했다. 2021년 초 프리미엄 스킨케어 브랜드를 론칭한 뒤 색조 화장품과 향수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해나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클린젠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클린피부과와 신약 개발 기업 프로젠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로, 기능성 화장품에 의약품의 치료 기능을 결합한 코스메슈티컬(Cosmeceutical) 전문 기업이다. 미백∙주름∙탄력 등에 효과가 있는 고기능성 화장품 개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에 한섬의 노하우, 현대백화점그룹의 유통망을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현대백화점 측은 설명한다.
화장품 진출은 패션에만 몰두해온 한섬의 신성장 동력 확보 차원으로 풀이된다. 패션사업에서 저렴한 제조·유통·일괄형의류(SPA)나 고가 명품 브랜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중간 가격대 아웃도어나 여성복, 캐주얼 등은 경기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터라 수요가 줄고 있다.
반면 뷰티는 경기 흐름의 영향을 덜 받고 패션과 소비자층·유통망이 겹친다. 패션에서 원단과 가공 처리비 등 의류 제작에 들어가는 원가를 비교해보면, 뷰티는 제조 성분이 더 저렴해 마진율도 높다. 또 각 브랜드나 브랜드 내 제품 라인마다 제조 성분 차이가 크지 않아 들어가는 원가는 비슷한데, 회사의 브랜드 파워에 따라 시장 가격이 달라지는 구조여서 이익 기여도가 더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넬과 구찌, 에르메스 같은 해외 명품 브랜드는 물론 신세계인터내셔날, LF 등 국내 많은 패션업체들이 앞서 화장품 사업에 진출한 이유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뷰티는 경기 흐름의 영향을 덜 받고 특히 스킨케어나 클렌징 제품은 매일 쓰는 생필품으로 인식되면서 경기가 나빠진다고 안 팔리지 않는다”며 “뷰티가 패션보다 마진율이 높고 패션사업에서 확보한 유통망을 활용하거나 패션 편집숍에서 화장품을 팔아 시장에서 테스트해보는 등 간접 진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아웃렛과 면세점 점포 확장에 나서더니 최근 그룹 산하 패션기업 한섬을 통해 화장품 회사를 인수하면서 업계 관심이 쏠린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지난 2월 개장한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시내면세점 2호점 매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다만 화장품 사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대기업부터 중소·중견기업까지 많은 경쟁자들이 포진해 있어 자리 잡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국내 화장품 제조판매업체는 2015년 6422개에서 2016년 8175개, 2017년 1만 79개, 2018년 1만 2673개로 급증했다. 연구·개발(R&D) 기술이나 생산시설이 없어도 마케팅으로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장품을 대신 생산해주는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 업체와 대신 개발·생산해주는 ODM(제조업자 개발생산) 업체에 위탁하면 된다.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한섬은 마케팅 노하우를 보유해 (화장품 사업) 초기 진입엔 어려움이 없겠지만 화장품은 R&D 기능이 축적돼야 중장기 지속 가능한 사업”이라며 “그러나 사드 보복 사태 이후 K뷰티 열풍이 많이 식었고, 브랜드 신뢰도와 로열티가 중시되면서 장기간 R&D를 축적한 J뷰티가 K뷰티를 앞지르고 있는 상황에서 업황 자체가 활황기가 아닌데 R&D 기능도 없이 뛰어든다면 얼마나 성과를 낼지 의문”이라고 내다봤다.
화장품업계 다른 관계자는 “최근엔 소비자 니즈가 더 다양해지면서 예측이 어렵고 소규모 업체가 갑자기 뜨고 지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경쟁자가 나온다”며 “시장점유율 1~2위 기업도 현재 입지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데 대기업이란 백그라운드만 믿고 뛰어든다면 성과를 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패션사업을 하다 뷰티에 진출한 LF, 코오롱FnC 등 여러 대기업 가운데 그나마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의 경우 2012년 뷰티시장에 진출한 뒤 매년 손실을 보다가 5년 만에야 흑자전환에 성공한 바 있다.
현대백화점이 대규모 유통망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화장품 사업 진출에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자사 유통망에서 판매하는 상품군을 패션과 식료품, 화장품으로 늘리면서 전체적인 유통 비즈니스를 하는 차원이라면 메리트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백화점이 확보한 탄탄한 고객층과 백화점·아웃렛·면세점 등 다양한 유통채널은 마케팅이나 인지도 제고 차원에서 대단한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안정을 추구하는 M&A 성향 역시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싣는다. 앞의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백화점그룹은 다른 유통 대형사들이 먼저 뛰어들어 성공한 시장만 진출하는 미투 전략을 써왔다”며 “리빙, 패션, 렌털 등 돌다리 경영을 통해 확실한 부분만 진출해왔고 일부 적자를 내는 회사는 있지만 전체로 보면 성적이 나쁘지 않다. 이번 화장품 사업 진출도 너무 늦은 감은 있지만 실패할 거라고 보진 않는다”고 전망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