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사퇴를 발표하는 장면. 미래통합당 관계자들의 표정이 어둡다. 미래통합당은 최근 전국선거에서 4연패 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여의도연구원은 그동안 미래통합당을 넘어 보수진영 싱크탱크 역할을 해왔다. 최초의 정당 정책 연구소로 1995년 발족한 여의도연구원은 선거 전략 수립부터 정책 비전 제시 등을 주도했다. 특히 여론조사 부분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의도연구원은 양질의 표본 확보, ARS 방식 여론조사 도입 등 시대를 앞서갔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도 여의도연구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표는 1990년대 말 여의도연구원에 근무하며 ARS 여론조사 기법을 배운 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를 창업했다.
여의도연구원 자체 여론조사는 21대 총선에서도 나름대로 위상을 뽐냈다. 총선을 하루 앞두고 있던 4월 14일 한 미래통합당 당직자는 “총선 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면서 “여의도연구원 관계자 말로는 185 대 115로 미래통합당이 참패한다는 예상이 나온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미래통합당 관계자도 “여의도연구원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헌 저지선(101석)을 확보하는 데도 비상이 걸린 것이란 분석이 있다”고 했다.
여의도연구원 예측은 적중했다. 총선은 집권여당 압승으로 끝났다. 더불어민주당, 더불어시민당은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했다. 미래통합당, 미래한국당 범보수진영은 10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여론조사만 놓고 봤을 때 여의도연구원이 족집게 수준으로 맞힌 셈이다.
총선이 끝난 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여의도연구원이 서울 용산 지역구 판세를 정확히 읽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총선 전 여의도연구원이 권영세 미래통합당 후보의 0.7%포인트 차 신승을 예상했는데, 실제 투표 결과가 거의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역시 여의도연구원의 여론조사 실력은 수준급”이라면서 “정치권에선 여의도연구원의 분석과 예측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보수진영에선 여의도연구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여의도연구원이 다 기울어진 판세를 예측만 하는 뒷북 전문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다. 미래통합당 몇몇 의원과 당선자들은 ‘여론조사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대책 마련을 해야 할 여의도연구원이 업무를 소홀히 했다’고 했다. 여의도연구원 무용론도 여기서 비롯된다.
2월 5일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 최고위원회의에 함께 등장한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와 성동규 전 여의도연구원장. 사진=이종현 기자
여의도연구원을 향한 곱지 않은 여론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성동규 전 여의도연구원장은 4월 1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미래통합당이 130석 이상을 얻을 수 있다“면서 ”미래한국당은 20석을 예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전선거 투표가 종료된 뒤 여의도연구원은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하며 미래통합당 참패를 예상했다. 총선이 끝난 뒤 성동규 여의도연구원장은 사퇴했다. 황교안계로 알려진 성 전 원장은 총선 이후 당 안팎에서 “지도부 눈치를 보느라 ‘오락가락 행보’만 했을 뿐, 제대로 된 싱크탱크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론에 시달렸다.
21대 총선에서 낙선한 한 미래통합당 의원은 “싱크탱크 역할은 이기기 위한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라면서 “전략의 부재가 총선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목소리가 당 여기저기서 나온다”고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여의도연구원이 싱크탱크가 아닌 당 지도부 어용기관으로 느껴진다는 말들은 분명히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연구원. 사진=연합뉴스
당 밖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5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해 “공천 전략에 있어서 여의도연구원의 역할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번 선거에서 여의도연구원이 공천을 관리하는 철저한 타기팅을 하지 못했다”면서 “반면 (진보진영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수없이 많은 연구로 타기팅을 했다”고 덧붙였다.
여의도연구원이 ‘족집게 여론조사’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도 당 곳곳에서 제기되는 상황이다. 또 다른 미래통합당 당직자는 “여의도연구원은 여론조사를 잘하라고 만든 기관이 아니다”라면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이 미비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다’는 예측을 해놓고, 그 예측만 맞아떨어졌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했다. 이 당직자는 “19~21대 총선까지 여의도연구원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보수 정당이 진다’는 예측을 하면서 당 지도부와 후보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 선거 기획자로 활발히 활동했던 한 인사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여의도연구원은 남다른 자체 여론조사 방식을 활용하면서 다른 연구기관들보다 훨씬 효율적인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면서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여의도연구원의 초점은 여전히 여론조사에만 맞춰져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고 했다.
그는 “여론조사를 하는 이유는 싱크탱크가 제시한 정책 비전을 정당이 얼마나 수용했으며, 이런 과정이 민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체크하기 위함”이라면서 “여론조사를 위한 여론조사만 해서는 여의도연구원이 존재할 필요성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보수진영 곳곳에서 제기되는 여의도연구원 무용론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2016년 6월 한 정의당 당직자는 “보수진영의 프레임 선점 능력은 진보진영에서 따라갈 수가 없다”면서 “여의도연구원이 항상 한발 앞서 좋은 정책을 선점한다”고 하소연했다. 이 당직자는 “여의도연구원에서 시작되는 보수진영 정책 선점 능력을 따라가지 못하면 진보진영엔 희망이 없다”고 토로했었다. 그러나 4년 만에 상황은 백팔십도 뒤집어졌다.
정당 정책 연구원의 주요 기능인 정책 비전 제시 부문도 낙제점이라는 분석도 있다. 21대 총선에서 낙선한 미래통합당 의원실 관계자는 “여의도연구원이 올해 초부터 ‘펭수에게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비전을 제시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당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제시하는 것이 싱크탱크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