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태풍이었던 비는 소나기로 바뀌었고, 가랑비처럼 잦아들었다. 그의 네임 밸류는 남아 있었지만 영향력은 예전만 못했다. 그리고 3년 전 ‘깡’을 발표했다. 비 특유의 고난도 퍼포먼스는 여전했지만 환호 대신 조롱이 뒤따랐다. 시대착오적인 콘셉트라는 혹평까지 받았다. 트렌드를 읽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2020년 5월, 비의 위상은 또 한 번 달라졌다. ‘깡’ 뮤직비디오를 하루에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의미인 ‘1일 1깡’의 주인공으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것. 그를 잘 모르던 10대들도 다시금 “레인”을 외치기 시작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20년 5월 비의 위상은 또 한 번 달라졌다. ‘깡’ 뮤직 비디오를 하루에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의미인 ‘1일 1깡’의 주인공으로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 사진=비의 ‘깡’ 뮤직비디오 캡처
#‘1일 1깡’, 유튜브 시대의 산물
지금까지 역주행의 대명사로 걸그룹 EXID의 ‘위아래’가 손꼽혀왔다. 그리고 이제는 비가 그 주인공이 됐다. ‘깡’의 뮤직비디오는 5월 23일 유튜브 조회수 1000만 뷰를 돌파했다. 이 가운데 대다수의 조회수가 최근 6개월 사이에 기록됐다.
그 뿌리는 ‘깡’이 아닌 ‘호박전시현’이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여고생 유튜버의 콘텐츠에서 찾아야 한다. 그가 지난해 11월 올린 20초 분량의 ‘1일 1깡 여고생의 깡(Rain-Gang) cover’와 2개월 뒤 재차 올린 약 2분 분량의 영상은 각각 25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유튜버가 비의 ‘깡’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영상이 인기를 끌며 온갖 패러디물이 우후죽순 격으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비가 없는 ‘깡’ 신드롬이 시작됐다.
이런 현상이 바로 밈(Meme)이다. 이는 소위 신세대라 불리는 10~20대들의 놀이문화다. 온라인상에서 특정 콘텐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모이며 자가발전 해나가는 식이다. ‘위아래’의 경우도 EXID의 팬이 라이브 공연을 펼치는 하니를 집중해서 찍은 소위 ‘직캠’ 영상이 화제를 모으며 역주행이 시작됐다. 가수 이애란의 ‘백세인생’ 역시 인기를 얻기 5년 전에 발표된 곡이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라고 전해라’라는 가사가 담긴 캡처 사진이 이모티콘으로 사용되면서 뒤늦게 발동이 걸렸다. 이 역시 한 대학생이 ‘백세인생’ 무대를 보다가 재미있어서 자발적으로 만든 콘텐츠였다.
밈이 구축되기 위해 동반돼야 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입소문이다. 이는 SNS에서 SNS로 콘텐츠가 전파되는 과정이다. 스마트폰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인 1폰’ 시대가 열리고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인들과 소통하게 되면서 재미있는 콘텐츠의 확산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이런 입소문이 바로 ‘바이럴(Viral) 마케팅’이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밈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재미’와 ‘공감대’가 핵심 키워드”라고 말했다.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비는 팬들이 만든 ‘비 시무 20조’에 일일이 답하며 웃음을 이끌어냈다. 비의 평소 퍼포먼스와 습관에 대한 놀림과 조롱이 가득했지만 비는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사진=MBC 예능 ‘놀면 뭐하니’ 방송 화면 캡처
#비의 등판, 그리고 김태호 PD의 촉
SNS를 통해 확산되던 ‘1일 1깡’ 열풍에 기름을 부은 주인공은 방송인 유재석이 진행하는 MBC 예능 ‘놀면 뭐하니’다. 비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1일 1깡’ 열풍에 직접 동참하기 시작했다. 아내인 배우 김태희조차 ‘1일 1깡’을 즐긴다고 말한 비는 “왜 1일 1깡을 하냐. 하루에 3깡 정도는 해야지. 아침 먹고 깡, 점심 먹고 깡, 저녁 먹고 깡. 식후깡으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인배의 면모를 풍겼다. 팬들이 만든 ‘비 시무 20조’에 일일이 답하며 웃음을 이끌어냈다. 사실 ‘비 시무 20조’를 만든 이들이 진성팬인지, 안티팬인지 알 수 없다. 그 안에는 비의 평소 퍼포먼스와 습관에 대한 놀림과 조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는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결정적으로 비의 퍼포먼스는 여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과거 히트곡에 맞춘 완벽한 무대를 보여줬다.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비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1일 1깡’을 통해 비의 존재를 알게 된 젊은 팬들은 비의 매력에 푹 빠졌고, 비의 위상을 알고 있던 팬들은 “역시”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모든 것은 ‘놀면 뭐하니’를 연출하는 김태호 PD가 설계한 판이라 할 수 있다. 김 PD는 ‘무한도전’ 시절에도 ‘백세인생’의 이애란을 향한 네티즌의 관심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섭외한 바 있다. 그동안 숱한 라이징 스타들이 ‘무한도전’을 통해 발굴된 것을 고려할 때, 김 PD는 ‘1일 1깡’을 통해 비가 전성기를 다시 맞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1일 1깡’ 열풍은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화제성과 올드미디어를 통한 보편성이 결합돼 일군 성과라 할 수 있다”며 “여기에 비가 가진 실력과 김 PD의 촉이 더해지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얻게 됐다”고 분석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