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의 한 사립대학교 도서관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없다. 사진=연합뉴스
논문이 유통되는 과정은 이렇다. 학회 소속 연구자나 일반 학자가 논문을 완성하면 학회 저널에 이를 투고하기 위해 일정금액의 게재료를 지불한다. 게재료는 적게는 수십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학회는 연구자로부터 ‘논문에 대학 저작권을 모두 양도한다’는 내용의 논문 저작권 이양동의서와 함께 논문 원본을 전달받는다. 특허권이나 지적 내용 등에 대한 소유는 저자의 것으로 인정되나 저작권 자체는 학회로 귀속된다.
학회는 교육부 출연기관인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외에도 한국학술정보(KISS), 누리미디어(DBpia)와 같은 민간데이터베이스(DB) 업체에 저작권료를 받고 논문을 넘겨준다. 공공재로서의 학술 지식을 좀 더 다양한 곳에서 열람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민간DB 업체들은 대학 도서관이나 자사 플랫폼을 통해 논문을 학생이나 연구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대한 이용료를 받는다. 전체 이용료의 20~30%는 저작권으로 학회의 몫이 된다.
다시 말해 원고가 저자의 손을 떠나면 이후의 수익이나 권리는 모두 출판사나 민간 업체로 넘어가는 구조다. 심지어 자기가 쓴 논문도 다시 다운받고 싶다면 DB 업체에서 직접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다수의 학자들이 ‘지식 생산의 공공적 가치’를 이유로, 권리 양도 등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지 않아 이러한 문제들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다.
문제는 최근 이러한 구조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보는 제3자가 발생하면서 불거졌다. 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김 아무개 씨(35)는 최근 자신의 석사 논문이 한 사이트에서 3000원에 판매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김 씨의 논문이 판매된 곳은 주로 대학생들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자주 들른다는 H 지식공유사이트였다. 판매자는 김 씨와 일면식도 없는 제3자였다. 누군가 김 씨의 논문 일부를 편집해 판매한 것이다.
김 씨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수년을 쏟아 완성한 논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3000~60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판매자는 학회도 아니고 DB 업체도 아닌 제3자였다. 해당 사이트에 연락해 곧바로 내려달라고 처리하긴 했지만 그동안 엉뚱한 사람이 내 논문을 가져다 이익을 봤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학창시절 구하기 어려운 논문은 동기들끼리 서로 사고팔기도 했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어 보니 오랜 노력의 가치가 고작 3000원인가 싶어 씁쓸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한 지식공유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논문 목록. 판매자는 대개 민간 DB 업체다. 사진=홈페이지 캡처
이 밖에도 해당 지식공유사이트에서는 수많은 논문의 원문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판매자는 대개 민간 DB 업체였다. DB 업체가 학회로부터 논문 파일을 양도받은 후 대학도서관 또는 자사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다른 지식공유사이트에서도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논문이 이런 사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법적으로만 따지기도 어렵다. 관련 조항이 계약서에 명시된 까닭이다. 문제는 계약 조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학회와 DB 업체 간 해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복수의 학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학회와 DB 업체 간 계약서에는 불합리하면서도 동시에 해석하기 나름인 조항들이 다수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립대학교 교수는 5월 26일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계약 내용을 누설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어 자세히 언급하기는 힘들다”면서도 “‘다양한 곳’ ‘여러 곳’ ‘필요한 경우’ 등 해석하기 애매한 일부 조항이 있다. 무료로 논문을 널리 알리고 싶은 학자 입장에서는 ‘공공성’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고 업체 입장에서는 ‘수익성’에 중점을 두다 보니 엉뚱한 곳에서 논문이 팔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학자들 스스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선봉에 선 것은 ‘지식공유연대’다. 지식 생산 및 활용의 공공적 가치 증진을 목적으로 4월 창립한 학자들의 모임이다. 지식공유연대의 박숙자 집행위원은 “H 사이트에서 교수들의 논문이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학회가 민간 DB 업체와 계약을 맺은 것은 논문이 온라인 배포를 통해 좀 더 많은 곳에 게재되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일부 업체가 논문 배포를 상업적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면 이는 지식이 갖고 있는 공공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외면하는 행위다. 그런데 지금은 학회조차도 논문 사용에 앞서 DB 업체의 허락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또 다른 논문 열람 플랫폼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업체를 통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무료로 논문을 제공하는 오픈액세스(OA)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숙자 집행위원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식 생산에 있어서 공공성의 가치를 잊고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학술 지식은 기본적으로 공공재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이 사비를 지출해가며 논문을 출판하고 권리를 양도해서라도 민간 DB 업체와 계약하는 이유”라며 “다만 OA 시스템 유지비용과 학술지 출판비용, 기존 학회의 참여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도 최근 공공 학술 DB 구축에 나서는 등 OA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한국연구재단은 5월 22일 한국대학도서관과 학술정보 공유를 위한 업무협약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한국연구재단 학술지(KCI) 논문은 전국 대학도서관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