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화웨이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예고하면서 반도체 업계에 거대한 태풍이 몰이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반도체 산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메모리반도체,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다. 메모리반도체는 데이터저장용으로, 삼성전자가 세계 1위다. 시스템반도체는 연산·처리를 담당하는 ‘두뇌’다. 미국의 인텔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파운드리는 반도체 생산시설이 없는 회사(팹리스 업체)로부터 주문을 받아 설계 도면대로 생산해주는 사업이다. TSMC가 압도적인 1위고, 그 뒤를 삼성전자와 인텔이 쫓고 있다.
이번 반도체 업계 태풍은 파운드리 시장에서 불고 있다. TSMC는 지난 5월 14일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약 15조 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5나노(㎚·1나노=10억분의 1m) 공정이 가능한 공장을 짓고 2024년부터 가동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6일 뒤인 5월 21일,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에 회사 보유 현금의 10%인 10조 원을 들여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새롭게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역시 새 생산라인에서 5나노 제품 생산에 나설 계획이다.
두 업체의 발표는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 삼성전자 간의 격차는 크다. 올해 1분기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4.1%, 삼성전자는 15.9%이다.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하면 TSMC는 6%포인트(p) 올랐고 삼성전자는 3.2%p 떨어졌다. TSMC가 삼성전자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있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향후 5나노 양산 공장은 TSMC가 삼성전자를 더 멀리 밀어낼지, 반대로 삼성전자가 격차를 좁힐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치트키’가 될 전망이다. 현재 7나노 이하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TSMC와 삼성전자뿐이다. 2004년 90나노 공정 시기에는 18개 업체가 경쟁했지만 이제는 높은 기술력을 가진 두 곳만 남았다. 사실상 ‘일대일 진검승부’인 셈이다.
#잡은 건 화웨이 멱살이지만 핵심은 ‘TSMC’
문제는 현재 상황이 두 업체 간의 기술력 경쟁만으로 끝나진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 초 1단계 합의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에 최근 다시 불이 붙었다. 미국은 화웨이를 ‘콕 집어’ 제재 카드를 꺼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지난 5월 15일 “오는 9월부터 미국산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세계의 모든 업체들은 화웨이에 반도체를 납품하려면 반드시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의 이번 결정은 TSMC와 삼성전자와 상당히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현재 화웨이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자회사 하이실리콘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실리콘은 반도체 생산시설이 없다. 설계대로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여기서 등장한다. TSMC는 미국 기술이 들어간 장비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오는 9월부터 미국이 제재를 시작하면, TSMC는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어야만 화웨이의 주문을 받을 수 있다.
현재로선 미국 정부가 허가를 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재 화웨이뿐만 아니라 미국 애플, 퀄컴, AMD 등 반도체 시장의 큰손들이 TSMC와 거래하고 있다. 미국 업체들은 모두 화웨이와 제품 경쟁을 하고 있다. TSMC에서 반도체를 받지 못하면 화웨이는 타격이 크다. 사실상 TSMC는 이번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이다.
공교롭게도 TSMC가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날은 미국이 화웨이 제재안을 공개하기 하루 전이다. TSMC가 미국 압박에 굴복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TSMC가 화웨이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거나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면 앞서의 애플과 퀄컴 같은 미국의 주요 큰손 고객들을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상황은 더 복잡
삼성전자의 상황은 TSMC보다 더 복잡하다. 당장 매출의 15%를 차지하는 화웨이와 거래가 어려워질 TSMC는 미국 고객사 확보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미 경쟁 우위에 있는 TSMC가 더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서면 삼성전자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도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이 있지만 생산시설이라기보다는 연구시설에 더 가깝다. 양산 수준도 11나노 정도라 TSMC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삼성전자는 미국 공장 신설이나 증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검토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일요신문DB
삼성전자 사업 구조에 한계도 있다. 삼성은 반도체를 만드는 동시에 스마트폰도 함께 만든다. 반면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슬로건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갤럭시를 만들고 있는 삼성에게 아이폰에 들어갈 반도체 설계도를 맡길 순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다른 고객사들도 최종 제품으로 삼성과 경쟁하는 곳들이다. TSMC 점유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TSMC가 잃을 화웨이 물량을 받아오는 일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평가다. 화웨이와는 최종 제품 경쟁자인데다, 무엇보다 TSMC와 똑같이 미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주문을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선 화웨이가 장기적으로 중국 파운드리 기업인 SMIC에 생산을 위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SMIC는 TSMC, 삼성전자와 비교하면 기술력이 높지 않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미국 제재에 대응하고 ‘반도체 굴기’를 위해 적극적으로 ‘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삼성전자 입장에선 화웨이가 제재를 받든, TSMC가 주요 고객을 잃든 반사이익은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도 관심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평택 파운드리 공장 설립 발표 직전 코로나19 검사를 여러 차례 받으면서까지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그만큼 중국 시장의 중요도를 높게 보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 우리나라 전체 수출 물량 가운데 20%가 반도체인데, 이 중 40%가 중국에 수출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압박과 중국 시장의 중요도를 두고 저울질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앞으로 화웨이에 타격을 주기 위해 제재 대상을 더 확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경우 지금은 대상에 오르지 않은 D램, 낸드플래시 등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이자 자금줄인 메모리 반도체 사업도 제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이번 화웨이를 대상으로 한 제재에 대한 범위와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행정명령 내용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당장은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에게 심각한 타격이 오진 않겠지만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미중 무역 갈등이 더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있어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