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금수저 불륜녀’ 여다경 역을 맡은 한소희는 자신 역시 이태오와 여다경의 불륜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진=나인아토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소희에게선 스물여섯, 그 나이 또래 특유의 발랄함이 묻어나왔다. 방영 기간 내내 모든 온라인 커뮤니티를 대동단결하게 만들었던 ‘여다경’의 모습은 한 점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부부의 세계’ 시청자들 이상으로 ‘이태오(박해준 분)’를 향해 폭발시키는 분노를 보고 있자면 인간 한소희 역시 이태오와 여다경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태오가 참 찌질한 면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지선우(김희애 분)의 뒤통수를 때리는 신,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순간 다경이가 태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태오는 다경이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 별로였던 기억이 나요(웃음). 만일 마지막 회처럼 태오가 다경이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면 다경이는 태오가 질려버렸을 거예요. 태오와 선우 사이엔 ‘애증’이 있지만 다경이와 태오 사이엔 ‘애’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자살하려는 그 순간에 태오에 대한 모든 정이 다 떨어져서 다경이는 그냥 그대로 돌아가 버리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극 중 한소희는 이미 지선우와 결혼해 가정이 있는 남자 이태오와 거침없는 불륜을 저지르며 마침내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금수저 불륜녀’ 여다경 역을 맡았다. 젊음과 미모로 사랑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본처보다 우월함을 느끼고, 또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지선우의 대용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또 다른 파국으로 치닫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캐릭터의 성격과 변화 탓인지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묘하게 여다경에게 이입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욕은 욕대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부부의 세계’에서 여다경은 이태오와 비교해 끝까지 벌을 받지 않는 ‘금수저 엔딩’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소희는 “여다경의 결말은 그 이후부터 지옥”이라고 설명했다. 사진=나인아토엔터테인먼트 제공
#“다경의 결말, 씁쓸하고 현실적”
‘부부의 세계 최대 수혜자’라는 평이 나올 만큼 한소희에게 여다경은 분명 그의 연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과 별개로 캐릭터에 대해선 객관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이 따랐다. 완벽하게 캐릭터에 빙의해 연기를 해내긴 했지만 그의 행동까지 이해하진 못했다는 게 한소희의 단호한 설명이다.
실제로 이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그는 딱 두 가지 인생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함부로 결혼하지 말고, 함부로 애 낳지 말자.” “신중을 기해서 결혼을 해도 박살날 수 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몇 번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 ‘부부의 세계’가 비혼 장려 드라마라는 대중의 지적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경이는 너무 오냐오냐 커서 그런 무모한 불륜 같은 짓도 저지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래서 부모님이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안 돼(웃음). 다경이의 마지막을 두고 누군가는 ‘금수저 엔딩’이라고 하더라고요. 불륜녀면서 왜 끝까지 벌을 받지 않냐고, 참 현실적이고 씁쓸한 결말이죠. 하지만 다경이의 결말은 그 이후부터 지옥일 거예요. 스물다섯에 아빠 없는 아이를 키우며, 사람들의 신뢰를 다 잃고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캐릭터예요. 결말만 보면 현실적이고 씁쓸할 테지만 그 뒤에 포커스를 맞춰주셨으면 해요.”
‘부부의 세계’ 방영 기간 불거졌던 흡연과 타투 이슈에 대해 한소희는 “내가 나라는 것에 솔직해지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나인아토엔터테인먼트 제공
여다경에서 한소희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서. 유독 ‘부티 나는’ 역할로 깊은 인상을 줬기 때문인지 배우가 되기 전 한소희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사람도 많다. 정말 여다경처럼 ‘온실 속 화초’ 같은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한 한소희의 대답에서는 예상 외로 만만치 않은 생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줄줄이 나오는 아르바이트 장소와 그곳을 일터로 고른 “시급이 세서”라는 이유는 그를 더욱 사람답게 느껴지게 했다.
“데뷔 전에 아르바이트 정말 많이 했어요. 사투리도 안 고친 상태에서 서울 사람들하고 생으로 부딪치면서 하던 사회생활이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서울 도착하자마자 주얼리 가게, 옷가게, 고깃집, 호프집, 장난감 가게 등 이것저것 되게 많이 했어요. 드라마 ‘돈꽃’ 촬영할 때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기억이 나요. 배우 데뷔하고 나서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는데, 사실 제가 그때까지 월급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한 달에 고정 수입이 없으면 너무 불안하더라고요(웃음). 일정 생활비가 제 통장에 찍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 해도 되는데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벗은 뒤 한소희에게선 그 나이에 맞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부부의 세계’ 방영 당시 불거졌던 그의 흡연과 타투 등 논란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 같은 에너지 덕이었을지 모른다. 성인의 흡연과 타투가 대체 왜 논란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비판적인 이슈에도 중심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은 대중으로 하여금 한소희라는 배우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드라마가 잘되면 잘될수록 제 많은 면모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여서 그 이슈를 두고 기분이 상하거나 특별히 의식하진 않았어요. 다만 ‘어떻게 하면 이런 부분들을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좀 했죠. 그러면서도 ‘내가 나라는 것에 솔직해지면 되는 거 아닐까.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다’라고 결론 내렸어요. 제가 감추는 걸 정말 잘 못 하거든요(웃음). 뭔가 거짓말로 속이면서까지 ‘저 인생 잘 살고 있어요’ 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제가 잘 살면, 숨기거나 하지 않아도 잘 사는 걸 다들 보실 테니까요. 아무래도 성격이 그러니까 저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 봐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