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계좌로 방송하는 BJ의 모습. 일반인은 대여계좌인지 금융사 계좌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사설 선물옵션 업체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방송인 김나영 씨의 전남편 A 씨가 구속되면서다. A 씨가 사설 선물옵션(파생상품) 업체를 차렸다가 구속돼 구설수에 오른 건 2018년이다. A 씨는 2016년 5월 서울에 위치한 S 컴퍼니 사무실에서 사이트를 개설하고 코스피200 지수 등과 연동되는 사설 사이트를 운영해 투자자들이 선물지수에 베팅한 결과에 따라 돈을 챙겼다. 그렇게 A 씨는 2017년 5월부터 2018년 9월까지 590억 원을 투자받아 수수료 및 손실금 명목으로 223억 원 수익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A 씨가 운영한 사설 사이트를 증권업계에서는 흔히 대여계좌 업체라고 부른다. 2013년 국내파생상품 업계에는 규제 쓰나미가 덮친다. 우리나라 파생상품 시장은 당시 10년 동안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조성됐고 이에 과열된 파생상품 시장을 진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규제안을 정부가 마련했다.
2013년 거래승수(계약당 단위)를 5배 올리자 소액으로 투자하던 개인투자자들이 파생상품 시장을 떠나게 됐다. 1계약의 단위를 1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개인투자자를 떠나게 한 규제는 2014년 ‘적격 개인투자자 제도’였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개인투자자가 선물·옵션에 투자하려면 각각 3000만 원, 5000만 원의 증거금이 필요하게 됐다. 투자자들은 무려 30시간의 온라인 교육과 50시간의 모의거래 과정도 거쳐야 했다. 옵션 투자도 1년여의 선물 투자 경험이 있는 투자자만 가능하게 제도가 바뀌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사실상 개인투자자는 국내 파생상품 거래를 하지 말라는 규제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때 등장한 게 김나영 씨 전남편과 같은 사설 선물옵션 업체였다. 이들은 증권사는 아니지만 증권사와 똑같은 HTS(홈트레이딩시스템)를 제공한다. 이들을 통해 투자자들은 고액의 증거금도 교육도 필요 없이 증권사와 똑같은 파생상품에 투자할 수 있었다.
제도권에서 파생상품에 투자하나, 대여계좌 업체를 이용하나 투자자 입장에서는 겉보기에 똑같다. 더구나 규제가 없기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대여계좌를 쓰게 됐다. 다만 대여계좌를 쓰게 되면서 당연히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데다 ‘먹튀’까지 만연해져 사회적 문제가 됐다. 대여계좌 업체들은 많은 고객을 유치할 때까지는 입출금을 원활하게 제공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락을 끊고 투자자에게 받은 돈을 들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대여계좌를 쓰는 이유는 뭘까. 몇 년 전 대여계좌를 이용했다는 한 투자자는 “대여계좌가 워낙 편했다. 사설 업체에 문의하고 프로그램 하나만 깔면 바로 파생상품 투자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대부분 대여계좌 업체를 통해 투자했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인식도 적어 다들 별 생각 없이 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결국 금융당국도 지난해 12월 노선을 바꿔 파생상품 규제 완화를 선언했다. 최우혁 유안타증권 부장은 “규제 강화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 불법 대여계좌 업체다. 금융당국에서 딱히 엄격하게 단속을 하지도 않았고 증권투자 관련 사이트에서 버젓이 배너를 걸고 홍보하는 경우가 많아 투자자들이 대여계좌 업체로 넘어갔다”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본예탁금과 교육시간을 대폭 줄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번 대여계좌 업체 쪽으로 넘어간 발길이 곧바로 제도권으로 돌아오지는 않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최근 유튜브, 아프리카 등 생방송 플랫폼에서 해외선물 계좌를 다루는 BJ들 대다수가 대여계좌를 쓰면서 홍보까지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도권 증권사가 아닌 대여계좌를 배너로 홍보하고 있다. 방송을 본 일반인들은 대여계좌가 불법인지도 모른 채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대여계좌 업체가 버젓이 증권사 이름을 달고 영업을 하는 데다 일반인은 파생상품 거래창만 보면 합법인지, 불법 대여업체 계좌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뭘까. 최우혁 부장은 “제도권 증권사 HTS는 계좌 잔고를 ‘실시간 잔고’라고 표현한다. 반면 대여업체는 잔고를 ‘담보금’이라고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파생상품 업계 관계자는 “보통 해외선물을 하면 달러로 손익이 표시된다. 원화로 표시되면 대여업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요신문이 찾아 본 해외선물 BJ들의 계좌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보금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김나영 씨 전남편처럼 당국의 인허가를 받지 않고 선물, 증권 등을 거래할 수 있는 사설거래소를 개설하게 되면 그 자체가 형사상 처벌을 받는 불법행위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이런 사설 선물거래소를 운영할 경우 자본시장법 위반뿐 아니라 형법상 도박장 개장 혐의도 받을 수 있다. 기소돼 처벌 받은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면서 “대여계좌 등 사설 선물거래소에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경우 도박죄에 해당할 수도 있어 투자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