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갈량’으로 칭송받던 염경엽 SK 감독은 올 시즌 최하위에 머무르며 ‘고개숙인 남자’ 가 됐다. 사진=연합뉴스
#히어로즈 감독 사퇴 발표와 SK 단장 선임
2016년 10월 17일, LG 트윈스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패한 당시 넥센(키움) 히어로즈의 염경엽 감독은 기자회견을 통해 뜻밖의 사퇴 의사를 밝혔다. 재임 기간 동안 팀을 4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지만 계약 기간 1년을 남겨두고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말한 것이다.
구단은 발칵 뒤집혔다. 염 감독이 히어로즈 구단과 상의 없이 먼저 사퇴 의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구단은 나름의 의미가 담긴 입장문을 발표했다.
“지난 8월 초부터 최근까지 구단은 물론 야구계 안팎에서 논란이 되고 있었던 염 감독의 거취와 관련한 여러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4년간 팀을 이끌었던 부분을 인정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공식 입장 표명은 물론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염 감독은 시즌 중반 이후부터 SK 감독 이적설에 시달렸다. 염 감독과 이장석 전 대표의 사이가 틀어졌고, 당시 김용희 SK 감독의 성적 부진으로 재계약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이 더해져 염 감독의 SK행 소문이 사실처럼 나돌았다. 그러나 염 감독은 소문을 강하게 부정했다. 언론과 히어로즈 구단이 이적설로 자신을 흔들고 있다며 자꾸 그러면 정말 팀을 떠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SK 와이번스가 트레이 힐만 감독을 영입하면서 이적설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민경삼 전 단장이 물러나고 당시 시카고 컵스 코치 연수를 추진 중이던 염 감독이 SK 신임 단장에 내정되면서 염 감독의 ‘엄포’는 빛을 잃었다. 흥미로운 것은 염 감독이 히어로즈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한 시기가 2016년 10월 17일이었고, SK가 신임 단장을 발표했을 때가 2017년 1월 17일이다. 정확히 3개월 만에 염 감독은 SK 단장으로 최고 대우를 받고 팀을 옮기게 된다(SK는 신임 단장에게 3년간 계약금 4억 원, 연봉 7억 원, 총액 25억 원에 계약을 맺었다. KBO 리그에서 연봉 7억 원을 받는 단장은 염 감독이 처음이었다).
히어로즈 팬들은 SK로 절대 가지 않을 것처럼 인터뷰했던 염 감독이 비록 감독직은 아니지만 SK 단장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사실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염 신임 단장은 당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내 인생이 쉽게 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단장으로 가는데) 결정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이미 결정했고 발표가 났지만 지금도 내가 이 선택을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낸 바 있었다.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킨 트레이 힐만 감독이 2년 만에 떠난 것 또한 염 감독이 내정돼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의혹제기도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힐만 감독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2018년 11월 13일, SK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트레이 힐만 감독의 후임으로 염경엽 당시 단장을 제7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대우는 단장 때와 똑같았다.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4억 원, 연봉 7억 원 등 총액 25억 원이었다. 염 감독의 연봉 7억 원은 당시 연봉 5억 원을 받던 류중일, 김태형, 김기태 감독을 제치고 역대 국내 프로야구 감독 연봉 중 최고액이었다. 2년간 단장으로 일하며 SK 와이번스의 선수 육성 시스템을 잘 구축했고, 향후 이를 기반으로 SK를 잘 이끌 수 있는 최적임자라는 판단을 했다는 게 SK의 입장이었다.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힐만 감독이 SK를 떠난 배경에는 새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고, 그를 간병하는 아버지가 어려움을 호소해 힐만 감독이 직접 부모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힐만 감독은 예상을 뒤엎고 2019시즌부터 마이애미 말린스 코치에 선임된다. 당시 미국 마이애미 지역 언론에서는 힐만 감독의 마이애미행은 돈 매팅리 감독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고, 매팅리 감독과의 친분으로 힐만이 코치를 맡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소개했다. 덕분에 힐만이 한국을 떠날 때 말했던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었다. 야구 관계자 A 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군 힐만 감독이 가족을 돌봐야 한다며 재계약 대신 미국으로 떠난 배경은 당시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마이애미 코치로 계약을 맺더라. 집이 있는 텍사스에서 가족들 돌본다고 말했던 사람이 마이애미에 직장을 구한 셈이다. 이것은 힐만 감독이 가족을 내세우며 한국을 떠난 이유가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A 씨는 SK가 원래는 넥센 소속이었던 염경엽 감독을 김용희 감독에 이어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려다 여론의 거센 반발로 2년 정도 팀을 맡길 수 있는 외국인 감독을 찾아 나섰고, 그때 일본프로야구(NPB) 경험이 있는 힐만 감독과 접촉해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힐만 감독은 SK가 영입할 당시부터 2년의 계약 기간을 마치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조건이었고, 단장으로 있는 염 감독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어받는 시나리오가 설계돼 있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10연패의 늪, SK 왕조의 현실
SK 감독 부임 첫 해였던 2019시즌 8월 중순 전까지만 해도 염 감독이 이끄는 SK의 기세는 매서웠다. 무려 9경기차 리그 1위를 질주하며 정규리그 우승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후반기 연패의 늪에 빠진 SK는 정규리그 1위를 두산에 내줬고, 플레이오프에서 키움 히어로즈를 만나 0-3으로 완패,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2020시즌 SK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광현과 일본프로야구로 방향을 튼 앙헬 산체스의 부재를 떠안고 시즌을 맞이했다. SK는 시즌 초반부터 추락을 거듭하다 5월 28일 현재 4승 16패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2위, 2년 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던 팀이 창단 20년 만에 10연패를 겪었고, 여전히 10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SK 팬들은 팀을 이끄는 수장, 염 감독의 지도력에 회의를 품고 있다.
현재 SK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포수 이재원은 손가락 골절상을, 채태인은 옆구리 통증을, 고종욱은 발목 부상을, 닉 킹엄은 팔꿈치 부상을 입은 데 이어 한동민, 김창평마저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염 감독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팀도, 나도 처음 겪는 상황이다. 위기는 그냥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준비를 잘못했다. 와이번스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바 있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잡음이 일게 마련이다. 벌써부터 SK 선수단 내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해설위원 B 씨는 “염경엽 감독의 위기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SK 연패가 길어지면서 선수들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심기일전을 위해 큰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지만 정작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잦은 실수와 실책으로 승리를 놓친 적도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감독의 마인드가 중요하다. 선수들의 마음을 잡고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한 염 감독이라고 해도 지금은 승부사의 기질보다 덕장의 면모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 야구는 결국 선수가 하는 것이다. 선수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지도자는 그 자리를 버티기 힘들다.”
이제 겨우 20경기를 치렀을 뿐이다. 남은 시즌 동안 얼마든지 반등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염경엽 감독이 자신의 지도력을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앞으로 펼쳐지는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SK 팬들은 긍정적인 의미의 ‘염갈량’을 보고 싶어 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