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대국이자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 지난 십수 년간 여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력, 군사력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넘버 원’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이 흔들리고 있다. 바로 뜻하지 않게 찾아온 코로나19 재앙 때문이다. 이미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확진자는 183만 명을 넘어선 상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현재 도시 곳곳에서는 폭동과 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실 이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의료보장제도와 그동안 해소되긴커녕 더욱 뿌리깊이 박혀있던 인종차별, 그리고 빈부격차로 인한 소외감과 박탈감이 한꺼번에 분출된 결과였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보면 과연 ‘아메리칸 드림’이란 게 존재하긴 했었나 의구심마저 들 정도. 최근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현주소와 함께 삶의 벼랑 끝에 서있는 미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감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보도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던 2020년 4월 20일 유타주 오렘에서 한 여성이 픽업트럭에 앉아서 생필품을 받아가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악마가 슬그머니 집안으로 들어왔다.”
과거 리츠칼튼 호텔 주방에서 일했던 조셉 프라이데이(52)는 7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부터는 이렇다 할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육류 공장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사고로 몸의 절반이 마비된 상태며, 얼마 전부터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동생인 매튜는 과거 경비원으로 일했지만 뇌졸중으로 네 차례나 쓰러졌고, 여기에 더해 신장질환까지 앓기 시작하면서 실직하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니 뉴욕주로부터 매달 1000달러(약 120만 원)의 생계지원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세 가족에게 하루하루는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형편에 더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브롱스 동물원 근처의 비좁은 집에서 살고 있는 가족에게 가장 처음 나타난 이상 신호는 기침이었다. 매튜가 먼저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이어 3일 만에 세 가족이 모두 기침 증상을 보였다.
지난 3월 24일, 매튜는 거실 소파와 탁자 사이에서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다음 날에는 더 이상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고,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망 원인은 코로나19 감염이었다.
어머니의 상태도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발작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출동한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지만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과 3일 만에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생계지원금까지 모두 잃게 된 프라이데이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국가가 자신을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를 알고 있는 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이제 그나마 남아있는 것조차 모두 잃을까 두렵다”.
이처럼 현재 미국에서 코로나19로 하루아침에 위기에 내몰린 미국인은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미 베트남 전쟁 때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이 코로나19로 희생됐으며, 1929년 대공황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휘청이는 미국의 이런 모습을 본 많은 경제학자들은 올 것이 왔다고 말한다. 싱크탱크인 ‘그라운드워크 콜라보레이티브’의 경제정치학 전문가인 자넬 존스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나무가 사실 안으로는 썩어가고 있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번개가 필요할 때가 있다. 코로나19가 바로 미국에 이런 번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존스는 이번 사태로 인해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이 사실은 얼마나 준비가 안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실은 얼마나 취약한 국가였는지, 얼마나 가난한 국가였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 정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지 시스템을 어떻게 약화시켰는지, 제약산업에 의해 좌지우지된 의료보험 정책으로 국가시스템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도 덧붙였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겉으로는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후부터 주식시장은 눈에 띄는 상승세를 나타냈고, 실업률도 기록적으로 낮아졌다. 기업들도 이례적으로 엄청난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고, 이런 호황은 계속될 것만 같았다. 트럼프의 말을 듣고 있으면 미국은 지상 최고의 국가였으며,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명실상부한 최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존스는 “코로나19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수익을 잃게 하는 데 고작 8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미국의 빛나는 겉모습 뒤에는 부패한 사회보장제도와 무능한 정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이미 트럼프가 자신의 치적으로 주식시장의 상승세를 뽐내고 있을 때부터 빈곤층에 속하는 약 4000만 명의 미국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려 8700만 명이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가입되어 있어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개인이 직접 부담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증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병가를 내고 일을 쉬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당장 먹고 살 수도, 병원비도 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산층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을 호소하고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서서히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사회안전망은 이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고 말았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노동자들이 실업수당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디즈니월드, 씨월드 등 테마파크가 밀집해 있는 관광도시인 올랜도에서 살고 있는 바바라 잉글랜드(32) 역시 이런 경우다. 현재 디즈니월드 인근의 낡은 호텔에서 남편과 네 자녀 등 여섯 식구와 함께 기거하고 있는 그는 지난 3월 초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디즈니월드 인근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인 ‘파파이스’에서 일했던 잉글랜드는 “바이러스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라며 허탈해 했다. 당장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난 가족들은 현재 월 1280달러(약 155만 원)하는 비좁은 호텔에서 체류하고 있다. 하지만 숙박비가 밀린 까닭에 여기서도 곧 쫓겨날 형편이다.
연방정부가 지급하고 있는 실업급여는 주당 최대 251유로(약 34만 원). 하지만 최대 3개월까지 지급되는 실업급여를 받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신청 방법이 복잡한 데다 조건 또한 까다롭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까지 대상자의 약 70%는 여태껏 한푼도 받지 못한 상태다. 잉글랜드는 “나는 실업급여를 한푼도 못 받는다. 조건을 충족시킬 만큼 오래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용직인 남편 역시 못 받는다”라며 허탈해 했다. 그는 “이제 나는 노숙자 신세가 됐다. 일명 ‘코로나 바이러스 노숙자’가 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미국이 차지하고 있던 강대국이라는 지위의 종말은 여러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수차례 예견되어 왔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미국은 오뚜기처럼 일어서곤 했었다. 지난 10년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사뭇 다른 듯하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미국 사회지도층의 결점들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코로나19 격리 기간 동안 몇몇 주의 골프클럽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소’로 여겨져 계속해서 문을 열었던 반면, 아이들이 뛰어놀던 동네 놀이터는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런가 하면 한 부유한 농구 스타는 증상이 나타난 즉시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선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억만장자 영화제작자인 데이비드 게펜이 코로나19 위기에 호화 요트에 몸을 싣고 먼 바다로 항해를 나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두의 안전을 빌고 있을 때 테네시주에서는 제때 임대료를 내지 못한 세입자들이 수도가 끊겨서 손도 못 씻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겉으로는 “모든 상황이 곧 좋아질 것”이라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면서도 뒤에서는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전에 내부자 정보를 듣고는 서둘러 주식을 내다 팔기도 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의 빈부 격차는 먼 옛날 봉건시대 때처럼 극단적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미국의 상위 10%는 하위 90%의 자산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 세 명은 미국인 1억 6000만 명의 자산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보면 지난 40년 동안 단순직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은 소폭 증가한 반면, 부유층과 갑부들의 소득은 420%가량 폭증했다.
더 무서운 점은 이게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올랜도에서 25년 동안 기독교 사회복지기관 대표로 일하고 있는 로버트 스튜어트는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진짜 쓰나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숙자들을 상대로 무료 급식소인 ‘데일리 브레드’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최근 들어 갑자기 급식소를 찾는 사람들이 네 배 이상 증가했으며, 심지어 이 가운데는 중산층인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 정오 무렵이 되자 급식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다음 블럭까지 길게 늘어섰다. 모두 사회적 거리두기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듯 가까이 붙어 서있으며, 이 가운데는 우아한 옷차림의 앤 키스와 두 딸도 있었다. 스티로폴 박스에 담긴 라자냐와 과일을 받기 위해 줄을 선 키스는 “교회에서 일했지만 헌금이 끊기자 실직했다”고 말하면서 “부끄럽지 않다. 단지 먹을 것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더 이상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추락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스튜어트는 진짜 최악은 한여름에 찾아올 것이라고 점쳤다. 3개월 후면 실업급여와 긴급재난지원금이 소진되고, 임대계약의 해약고지 기간이 만료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쯤 되면 통장에 저축해 놓은 돈도 바닥이 날 테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스튜어트는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끼 정도는 제공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여름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걱정했다.
어쩌면 진정한 미국의 힘은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고 ‘슈테른’은 말했다. 바로 위기 속에서 빛나고 있는 일반 시민들 간의 신뢰와 유대감이다. 크론병과 대장암을 앓고 있는 마이클 쇼키(37)는 일하던 제과점에서 해고되자 가장 먼저 병원비와 약제비가 걱정이었다. 이렇다 할 저축도 해놓지 않았던 탓에 당장 도움이 절실했던 그는 공포에 떨었다. 하는 수 없이 급한 대로 트위터를 통해 도움을 요청했던 그는 “나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항암제를 구입할 돈이 없다. 먹을 것도 없고, 집세를 낼 돈도 없다.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 결과 당장 필요한 200달러(약 24만 원)의 기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에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 아예 ‘고펀드미(GoFundMe)’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이곳에서는 나처럼 도움이 필요한 절망적인 사람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수중에 돈이 없어서 갖고 있던 당뇨약까지 내다 팔고 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국가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쇼키는 “미국의 의료보장제도가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었다니 정말 큰일이다. 이제 사람들은 의약품을 구입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구걸을 해야 할 처지다”라고 비난했다. 이어 그는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서로 간의 신뢰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국가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신뢰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쇼키에게 기부한 사람들은 429명에 달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 역시 그런 위험에 처했던 적이 있다”며 공감을 표시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모두를 위한 의료보장제도가 없는 한 서로 도와야 한다” “함께 이겨냅시다”라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본 ‘슈테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위대한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석학 스티글리츠의 비판 “사회보장 대폭 축소…최악의 나라 됐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다”며 “이는 수십 년간 사회보장시스템이 대폭 축소된 결과”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사진=AP/연합뉴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요즘 미국의 상황을 보면서 매우 격분하고 있는 석학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한번 상상해 보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보장시스템이 대폭 축소된 결과다. 사회적 불평등은 급격하게 심화돼서 미국은 현재 서방국가에서 가장 낮은 기대수명과 국민들 건강 수준이 최악인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비난했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그는 상당 부분이 공화당의 신자유주의 이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국가는 긴축재정을 펼쳐야 하며, 모든 것을 자유경제 시장에 믿고 맡겨야 한다’는 논리가 결국은 미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그들은 코로나 환자들에게 10일 동안 병가를 보상하기로 한 법안을 거부했다. 그렇게 하면 환자들이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위해 대기업들이 사전에 조직적으로 로비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분노로 할 말을 잃었다”고 격분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미국에서는 실업률이 30%까지 치솟을 수 있다. 분명한 점은 그나마 보잘 것 없는 실업급여를 받고 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라며 경고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볼 때 스티글리츠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결국 공허한 환상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만일 트럼프가 11월 재선에서 패하고, 공화당이 상원에서 과반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변화의 기회가 있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미국에는 새로운 대공황이 닥치고, 이는 결국 미국과 전세계 경제의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