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선의 첫 스크린 주연작 ‘결백’은 ‘또 하나의 약속’ ‘재심’에 이은 이노센스 3부작의 완결편이다. 사진=영화 ‘결백’ 스틸컷
앞서 제작진이 밝힌 제작의도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유무죄의 판가름을 떠나 진실 그 자체를 좇고 있다. 어딘가에 감춰진 무결한 진실이라기보다는 벽돌집처럼 하나씩 쌓아가는 진실이 결백의 토대가 된다. 초장부터 뚜렷하게 비춰 보이는 악역의 존재 탓에 그의 몰락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켜켜이 쌓이는 진실의 완성을 보고 있자면, 빤히 보이는 이 길을 따라 온 것이 시간낭비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결백’은 유명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신혜선 분)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발생한 농약 막걸리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치매에 걸린 엄마 ‘화자’(배종옥 분)가 지목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실 추적극을 그린다. 2009년 전남 순천에서 발생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며, 세부적으로는 2015년 경북 상주에서 발생한 ‘농약 사이다 사건’의 일부분이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극중 정인은 가족에 대해 애증을 품고 살아온 인물로 그려진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아버지를 향해서는 처절한 ‘증’을, 어머니를 향해서는 ‘애’에 가까운 애증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깔려 있다. 그렇기에 몇 년을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냈던 어머니가 농약 막걸리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자 대형 사건을 마다하고 한달음에 그의 고향 충남 대천으로 내려오게 된다.
사진=영화 ‘결백’ 스틸컷
이런 장르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정인의 고향 대천 역시 고향 사람들만이 단단히 뭉쳐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서울 물을 먹은 엘리트 변호사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뼈까지 묻게 된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서도 묘하게 악의에 찬 기류가 느껴진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불구속으로 풀려나게만 하려고 했던 정인의 계획이 ‘진실 추적극’으로 틀어지게 된 것은 이 기류를 느끼면서부터다. 이 시점부터 영화에는 약간의 액션과 스릴러가 가미된다. 입으로만 싸워 온 변호사가 난생 처음으로 두들겨 맞고 구르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등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 무비의 추적 신으로 나아가는 셈이다. 이제까지의 비슷한 유형의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맞고 차이며 구르는 당사자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것.
신혜선과 배종옥이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스토리의 완급 조절은 “여성의 추적극은 긴장감만 있고 무게감은 없을 것”이란 편견을 산산조각낸다. 냉철하고 철두철미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는 딸 정인과, 혼자만 알고 있는 진실을 안고서 치매로 흐려진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엄마 화자.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증폭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통곡을 유발할 수 있는 강제적인 장치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두 여성 배우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중심축 덕일 터다.
사진=영화 ‘결백’ 스틸컷
특히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후반부 클라이맥스 속, 신혜선의 정인과 배종옥의 화자가 유리창에 비친 모습대로 서서히 얼굴이 겹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놓쳐서는 안 될 신이다. 제작진은 “기억을 잃고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게 느낄 정인의 막막한 감정,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화자의 고립감을 폐쇄된 공간을 통해 표현하려 힘썼다”라며 “인물에 집중한 빛의 조도, 유리창에 반사된 두 사람의 얼굴, 반사된 얼굴이 겹쳐지는 지점 등에서 관객들도 두 사람의 감정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 속에서 닻처럼 존재하는 허준호라는 배우 역시 이 영화에 완벽이라는 말을 더한다. 극중 ‘만악의 근원’인 대천시장 추인회 역을 맡은 그는 이미 극초반부터 악역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구현 방식이 결코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악역 그 이상의 악역을 보여준다.
사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허준호는 주변을 모두 집어삼키는 배우다. 웬만한 반짝임으로는 도무지 뚫을 수 없는 블랙홀 같은 존재감을 보이는 그와 함께 스크린에 나선다는 것은 모험일 수도 있을 터다. 그러나 ‘결백’ 속 신혜선은 허준호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빛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신혜선의 첫 스크린 주연작이라는 점을 알고 본다면 그의 연기에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을 숨기기 어려울 것이다. 첫 주연작을 배종옥과 허준호, 두 국민배우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신혜선에게 행운이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신혜선이란 배우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행운일 터다.
사진=영화 ‘결백’ 스틸컷
영화는 ‘또 하나의 약속’과 ‘재심’을 제작한 영화사 이디오플랜의 작품으로도 눈길을 끈 바 있다. 두 영화에서 이어지는 ‘이노센스 3부작’의 완결편인 ‘결백’의 결말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양극으로 갈릴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결백은 무죄와 같은 말인가. 죄를 저지르는 것도 인간, 죄를 판단하는 것도 인간. 그렇다면 법 위의 인간과 법 아래의 진실은 어떻게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또 올릴 수 있을 것인지를 영화는 묻고 있다. 명답은 있어도 정답은 없을 질문이다.
한편 영화 ‘결백’은 오는 11일 개봉한다. 당초 3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여파로 두 차례 개봉이 연기됐다. 그럼에도 ‘비밀의 숲’ ‘황금빛 내 인생’ ‘단 하나의 사랑’에서 신뢰감 있는 연기력을 보여준 신혜선과 대한민국 대표 국민배우 배종옥, 허준호 등 전 세대를 아우르는 연기파 배우들의 호흡으로 대중들의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