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으로 이뤄진 채권단이 두산중공업 위기 이후 최근까지 경영정상화를 위해 지원한 자금은 총 3조 6000억 원이다. 대규모 공적자금이 들어간 만큼 채권단은 투자된 자금 회수를 최우선 과제로 올려놨다. 두산그룹이 전 계열사와 자산을 총동원해 만들고 있는 자구안도 ‘빚을 어떻게 갚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산그룹은 두산타워 매각을 우선순위로 올렸다. 두산중공업과 두산큐벡스가 각각 운영하고 있는 골프장 두 곳도 매물로 내놨다. 지주사가 거느리고 있는 사업부문 매각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를 모두 매각해도 두산그룹이 가져갈 수 있는 현금은 많지 않다. 두산타워 등은 이미 담보로 잡혀있어 대출금을 내고 나면 매각 대금은 반토막이 된다.
이 때문에 두산이 두산솔루스 매각에 거는 기대가 컸다. 미래 성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며 기업가치(EV)를 최대 1조 5000억 원으로 책정했다. 두산은 이 가격에 파는 데에 성공한다면 채권단으로부터 받은 지원 자금의 30%가량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두산솔루스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인 만큼 이 사업을 하는 대기업들의 참여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두산솔루스 예비입찰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두산그룹이 추가 매물을 내놓을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지난 6월 2일 매각 주관사인 삼일회계법인이 진행한 두산솔루스 예비입찰 결과는 참담했다. 그동안 시장에서 회자된 인수 후보들이 대거 불참했다. 글로벌 PEF(사모펀드)마저도 참여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두산 쪽은 일정이 다소 촉박하게 진행됐던 만큼 입찰에 늦게 참여하더라도 받아주겠다는 입장이라 최종 참여자 수는 추후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비입찰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롯데그룹부터 불참했다. 당초 롯데그룹은 지난해부터 ‘M&A(인수·합병)를 통한 사업 다각화’를 공고히 한 롯데케미칼을 통해 인수전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여파 등을 고려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인수·합병보다는 유동성 확보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튼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유력 후보로 꼽히던 SKC도 예비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SKC는 지난해 동박 생산업체 KCFT를 인수했지만, 최근까지 공격적으로 현금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두산솔루스 인수전에 뛰어들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실제 SKC는 화학 사업부문의 절반과 SKC코오롱PI 지분 전량을 매각하면서 지난해 말 800억 원이었던 보유 현금을 불과 3개월 만인 올해 1분기 4500억 원까지 늘렸다.
최근 현대백화점그룹 계열 현대HCN에 SK바이오랜드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인데, 계약이 성사되면 현금성자산은 7000억 원 수준까지 불어난다. 그러나 SKC 역시 “현금 마련은 유동성 확보 차원”이라고 선을 그었다(관련기사 ‘가려운 곳 아는 사이’ SK-현대백화점 계열사 주고받기 가능성은?).
IB(투자은행)업계에선 두산솔루스 흥행 실패 원인으로 가격을 꼽는다. 원매자 쪽은 두산이 기대하는 매각가(1조 5000억 원)보다 적은 1조 원 이하를 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산은 두산솔루스 매각가를 정할 때 미래 성장성을 높게 평가했는데, 시장과 다소 의견 차이가 있다. 1조 5000억 원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주력인 전지박·동박 부문 생산량이 7만~8만 톤 수준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생산여력은 1만 톤에 불과하다.
IB업계 관계자는 “공장 증설이 예정돼 있지만 늘어나도 2만 톤 수준”이라며 “결국 원매자가 인수 이후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한다. 프리미엄을 얹어 주더라도 1조 5000억 원은 부담스럽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두산솔루스 매각이 장기화되면 경영정상화 계획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매각 대금은 차입금 상환 자금인 동시에 유상증자를 위한 실탄이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은 두산중공업 유상증자를 추진할 방침이다. 자산 매각에 외부 자금도 끌어와 두산중공업에 수혈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두산중공업의 지분 34.36%를 지주사 두산이 유상증자에 참여해 자금을 지원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데, 두산솔루스 매각 대금을 고스란히 두산중공업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 매각에 실패하거나 매각가가 낮아질 경우 유상증자 방안의 실효성이 낮아진다.
두산그룹과 같이 채권단도 두산솔루스의 매각 성패가 빚 상환 등 자구안 이행의 핵심으로 판단하고 있다. 금융권에선 채권단이 이번 예비입찰 흥행 실패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으로 관측한다. 이에 따라 두산솔루스 외에 두산인프라코어, 두산퓨얼셀, 두산밥캣 등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추가로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두산중공업이 경영정상화를 통해 친환경 에너지 전문기업으로 사업을 재편하겠다고 밝힌 만큼 친환경 발전 사업을 하는 두산퓨얼셀은 매각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그룹의 미래를 이끌 계열사인데다 몸값도 비싸고 국가 핵심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어 매각이 어렵다.
결국 남는 건 두산밥캣이지만 두산밥캣을 매각하려면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 현재 ‘두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두산밥캣’ 구조라 당장 밥캣을 팔더라도 매각대금을 두산중공업에 수혈할 수 없다.
두산밥캣은 현재 인프라코어와 함께 두산중공업의 마지막 남은 현금창출원이다. 함부로 떼어낼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시장 일각에선 인프라코어를 인적분할해 밥캣의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프라코어를 사업회사로 분리하고, 투자회사는 두산중공업과 합병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두산중공업은 밥캣을 품고 정상화까지 시간을 벌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매각해 자금을 수혈할 수도 있다.
IB업계 다른 관계자는 “아직 두산솔루스 매각 작업이 초기단계고, 다른 매물들도 시장에 나와 있다. 특히 현재로선 두산밥캣을 떼어내면 두산을 ‘죽이는 구조조정’이 되는 만큼 채권단이 당장 매각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라며 “다만 매각 작업이 장기화되거나 최악의 상황까지 몰릴 경우 다른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