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은 지난해 심한 몸살을 앓았다. 창업자 김정주 NXC(넥슨 지주사) 회장의 매각 추진이 실패하고 대형 게임 프로젝트들의 개발을 중단했다. 올해 오웬 마호니 넥슨 일본법인(넥슨코리아 모회사) 대표가 지난 3월 말 ‘매각 추진 종료 선언’을 하기 직전까지도 여진은 계속됐다.
그런데 지난 4월, 넥슨의 국내법인 넥슨코리아 ‘현금창고’에 거액이 들어왔다. 넥슨의 효자 IP(지식재산권) ‘던전앤파이터’를 가진 자회사 네오플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총 1조 4961억 원을 빌렸다. 그동안 넥슨코리아가 쌓아둔 현금까지 더하면 현금성 자산은 약 2조 2073억 원에 달했다. 넥슨은 차입 목적에 대해 “운영 자금 및 투자 재원 마련”라고 밝혔다.
통상 기업이 단기간에 현금을 채우면 대규모 M&A나 투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넥슨은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타격도 받지 않았고, 운영자금이 모자란 회사도 아니다. 특히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M&A를 주도해왔던 지주사 NXC가 아닌 넥슨코리아에 자금이 쏠린 만큼 게임과 IT부문 등에서 ‘빅딜’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렸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넥슨이 4월 한 달 사이에 쌓은 현금은 2012년 엔씨소프트 1대 주주로 오르는 데 쓴 8000억 원의 3배에 가까운 규모”라며 “이 돈을 단일 거래에 모두 쓴다면 업계 판도가 달라질 정도의 초대형 거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일, 넥슨은 15억 달러(약 1조 8000억 원)의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넥슨 매출의 68%(2조 6840억 원)에 달하는 규모다. 그러나 정확한 투자 대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힌트만 남겼을 뿐이다. 넥슨이 공식화한 투자의 조건은 ‘훌륭한 경영진이 운영하는 곳’이자 ‘뛰어난 IP를 창출 및 유지하는 능력이 입증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상장사’, 투자 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소수 투자자로서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압축된다. 즉 국내·외 분야를 가리지 않고 콘텐츠 IP 확보에 무게를 싣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넥슨이 시장에 던진 ‘투자 퀴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넥슨코리아 본사. 사진=박정훈 기자
#디즈니, 넷플릭스 거론…제3의 투자처 향할 수도
넥슨은 최근 수년 사이 신규 IP 개발에 번번이 실패해왔다. 2012년부터 5년간 200억 원의 개발비를 투입한 모바일 게임 ‘듀랑고’는 출시 2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2019년 초 자체 IP를 통해 만든 모바일 게임 ‘스피릿위시’와 ‘트라하’ 역시 실패했다. 2011년부터 9년 동안 개발했던 ‘페리아 연대기’는 정식 출시도 못하고 개발을 접었다. 현재 관심을 받고 있는 게임은 ‘던전앤파이터 모바일’과 ‘바람의나라:연’인데, 두 게임 모두 오래 전 넥슨이 개발한 IP를 재활용했다.
넥슨이 공개한 힌트에서 핵심 단어는 세 가지로 추려진다.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상장사, IP, 경영권 참여 없는 투자다. 실패의 쓴잔을 연달아 마신 만큼 자체 IP 개발 대신 유명 IP를 보유한 곳에 투자하거나 인수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셈이다.
힌트를 조합해 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곳은 디즈니다. 미키마우스로 대표되는 만화 캐릭터와 스타워즈, 그리고 어벤져스와 스파이더맨 등으로 유명한 마블 스튜디오, 21세기 폭스 등의 IP를 보유하고 있다. 김정주 회장의 각별한 ‘디즈니 사랑’도 ‘유력 후보설’에 힘을 싣는다. 김 회장은 그동안 넥슨을 디즈니처럼 성장시키고 싶다고 밝혀왔다. 지난해 매각 추진 과정에선 디즈니에 인수 의향을 묻기도 했다.
2002년 나스닥에 상장한 넷플릭스도 물망에 오른다. 드라마와 영화 등을 자체 제작하면서 콘텐츠 업계 다크호스로 떠오른 지 오래다. 시리즈 드라마 속 독창적인 세계관과 대립 구조 등은 게임사들이 RPG(롤플레잉) 장르 게임을 만들기에 최적화된 콘텐츠다. 넷플릭스 역시 IP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산업 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시너지를 통한 수익 창출을 추진하고 있다.
그 밖에 북미의 전통 게임업체들도 거론된다. FIFA시리즈로 유명한 업계 1위 EA와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등으로 잘 알려진 액티비전 블리자드, 업계 3, 4위 테이크투인터렉티브와 유비소프트 등이다. 이 회사들은 세계 콘솔과 PC게임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업체들의 기업 가치를 감안하면 2조 원에 가까운 투자를 하더라도 유의미한 협력을 이끌어 내기엔 부족하다는 반론도 있다. 디즈니의 시가총액은 현재 우리 돈으로 262조 원, 넷플릭스는 229조 원이다. 단일 거래를 하더라도 지분을 1%도 가지지 못한다.
같은 기준으로 북미 게임업체들 역시 시가총액이 EA 43조 원, 블리자드 68조 원 등으로 덩치가 만만치 않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특히 디즈니의 콘텐츠 비즈니스 구조는 보증금을 내고 향후 수익 일부를 떼어 주는 방식”이라며 “굳이 조 단위 투자를 하지 않아도 디즈니 콘텐츠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넥슨이 시장에 잘 알려진 콘텐츠 업체가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의 전통 게임 업체들이다. 그동안 일본 게임 업체들은 IP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개방에 소극적이었다. 일부 협업 사례가 있긴 하지만, 검수 작업을 깐깐하게 진행하면서 개발 속도가 장기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넥슨이 이러한 관행을 깰 수 있는 새로운 딜을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빅딜’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게임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일본 게임 업체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린 이후 회사 가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시가총액은 닌텐도가 68조 원으로 가장 크고, 반다이남코가 15조 원, 스퀘어에닉스, 캡콤, 코나미, 세가 등이 각각 7조, 6조, 6조, 4조 원 등으로 뒤를 잇는다. 닌텐도를 제외하면 1조 8000억 원을 투자해 2대주주까지 노려볼 수 있다. 이 경우 단순 협업보다 높은 단계인 ‘파트너’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넥슨 측은 여전히 “현재 단계에서 투자 대상은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게임업계 다른 관계자는 “넥슨이 투자금을 단일 거래에만 쓴다고는 하지 않았다”며 “단정할 순 없지만 일본 게임 업체에 분산 투자하는 방식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