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밑으로 철로가 깔려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열차는 점촌에서 김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사고 지점인 상주군 함창면 인근은 주거 지역이었다. 철로로 주민들이 들어올 수 없게끔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이원구 일병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선택이었다. 당시 수재들만 간다던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똑똑한 병사’라는 소리를 듣던 이 일병이었다. 똑똑한 이 일병이 철로에 누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고 전날 외출을 나와 당일 저녁 8시까지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공산당 부역자라는 말은 누명이었어요. 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해 혼자 글을 깨쳤어요. 그러다 보니 마을 이장들에게 시기 질투를 많이 받았어요. 이장들이 경찰에 그렇게 말한 거지. 아버지는 평생 농사꾼이었는데 부역자라니 얼토당토않아요. 당시엔 연좌제가 있었거든요. 부역한 놈 자식이 되고 나니까 지방 공무원에 합격해도 발령이 안 나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들 손가락질 받으면서.”
이원구 일병의 큰형 병오 씨는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훔쳤다. 한국전쟁 이후 혼란 시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았다. 그때 아버지는 공산당에 부역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동시에 자식들은 ‘부역한 놈의 자식’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연좌제로 불이익이 따라다녔다. 세상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학교, 직장, 마을 어디서든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알 사람은 알았다.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3남 2녀 5형제는 손가락질 받기도 했지만 속으론 기죽지 않았다. 5형제는 우애도 돈독하고 머리도 좋았다. 그 가운데 가장 머리가 남달랐던 건 셋째 이원구 일병이었다.
“아유, 말을 마라. 동생은 머리가 비상했지. 우리 중에 제일로 뛰어났어. 시체가 돼서 트럭에 실려 오는 걸 보는데 믿을 수가 없었지.”
이원구 일병은 1974년 9월 6일 입대했다.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뒤 3개월이 지난 1974년 12월 6일이 돼서야 김천의 보병사단으로 전입했다. 덜컥 홀로 신입 병사가 부대에 오자 선임 병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훈련소를 마치고 두 달 안에 전입 받는 게 보통이다. 이내 소문이 돌았다.
‘그놈 부역자의 아들이다. 그래서 다른 부대를 전전하다가 이곳 부대로 떨어졌다.’ 소문은 일부분 사실이었다. 이 일병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금의 국가정보원)에 차출됐다. 똑똑한 데다 당시 타자를 칠 줄 알았다. 그런데 신원조회에서 발목이 잡혔다. 평생의 꼬리표 ‘부역자의 자식’이 또 한 번 벽으로 다가왔다. 이후 보안대로 다시 차출됐다가 또 거부당했다.
당시 인사주임이었던 오 아무개 소령은 “신원조회에서 떨어져 마지막으로 소속대로 전출됐다. 부대 전입했을 시점에 망인과 면담 시 얼굴에 수심이 많이 있었다”고 이 일병을 기억했다.
이 일병은 선임 병들의 좋은 ‘타깃’이었다. 가뜩이나 매일 구타가 난무하던 부대에서 부역자의 아들 몇 대 더 때린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오 소령은 “망인의 아버지가 부역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부대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선임 병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대 간부들도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모른 체했다”고 전했다.
같은 부대 선임병 박 아무개 씨는 “당시엔 정신봉이라는 막대기가 있었는데, 후임 병들이 실수하면 어깨, 엉덩이 빠따를 맞았다. 점호 시간에 얼차려를 받기 전에 주먹이 먼저 날아오곤 했다. 얼굴, 몸, 머리, 무조건 때리는데 신임 병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맞기만 했다”며 “소원 수리를 써봐야 적발이 되면 그 사람은 부대에서 매장이 되기에 소원 수리를 이용하는 병사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동기병이었던 정 아무개 씨는 “저녁점호 때는 빨리 맞고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일 구타가 있었다. 이 부대의 전통이었다. 줄빠따도 최고선임부터 막내까지 내려오면 100여 대를 맞았다. 아파서 우는 병사가 나오기도 했다”며 “탈영을 고민한 적이 있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다 함께 구타당하는 상황에서 이원구 일병에게 중요했던 건 좀 덜 맞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어딜 가든 들어야 했던 ‘부역자의 자식’이라는 말, 그것이 그를 철로로 이끌었던 건 아닐까.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엔 “끈기 있고 모든 일에 신중하며 인내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많은 학생으로 성적은 좋은 편”이라는 말과 “성실하고 근면하며 협동적이고 내성적이며 타자에 특별한 기능이 있음”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명호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원구 일병을 심리부검한 결과 “자신의 뛰어난 성취능력, 업무능력과 상관없이 부친의 부역 문제로 군대에서 좌천되는 경험을 하면서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였을 것”이라며 “외견상 눈에 띄는 정서적 문제가 관찰되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망인은 심리적으로 매우 강력한 우울, 불안, 무망감(Hopeless) 등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대에서 이원구 사망’, 이원구 일병의 삶은 전보 한 줄에 담겼다. 이 소식을 먼저 전해들은 여동생과 사촌형은 부대를 찾았다. 시신을 인도하겠다는 가족을 향해 군은 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군사 정부 시절, 군의 위세는 남달랐다. 다음 날 큰형인 이병오 씨가 따졌다. “이 자식들아, 아버지, 어머니가 눈 시퍼렇게 뜨고 아들 마지막 얼굴 보려고 기다린다”고.
그다음 날 이원구 일병 시신은 트럭에 실려 왔다. 집안은 울음바다였다. 큰형 병오 씨는 당시 아버지의 절규를 회상하며 또 다시 눈물을 쏟았다. 이제 70대 노인이 됐지만 그날을 잊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동생을 선산에 매장했어요. 땅을 파고 관을 집어넣었는데, 아버지가 그 안에 들어가선 나오질 않더라고요. ‘자식 죽인 애비가 어찌 살 자격이 있느냐’고. 그때 ‘아 내가 시체를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찌 말로 다 하겠어요.”
이병오 씨는 48년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짐을 덜었다. 지난해 6월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냈고, 위원회는 1년여 걸친 조사 끝에 부대 관리 소홀 등의 이유로 이원구 일병을 순직 권고 결정했다.
동생 명예는 회복됐지만 그 사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동생이 죽고 난 뒤엔 ‘이상한 놈이니까 군에서 죽었다’, ‘가족도 똑같다’는 손가락질을 견뎌야 했다. 병오 씨는 남동생 사건 해결을 두고 여동생과 갈등이 생겨 지금은 남남처럼 지낸다. 청와대에 진정을 넣는 등 사건을 해결하고자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자 이 씨는 이원구 일병과 관련한 문서를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여동생은 그런 이 씨에게 화를 내며 서류를 챙겨 나간 뒤 왕래를 끊었다. 그래도 이 씨는 “이제 후련하다”고 전했다.
이원구 일병 사건을 조사한 신헌주 조사관은 “대한민국 헌법 13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 한다’며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시대였다”며 “권위주의적 군사 문화와 잘못된 수사 관행이 낳은 비극이었다. 당시 국가가 자살이 아닌 순직 처리로 망인의 명예를 회복했다면 한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