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기 승부수의 방아쇠를 당겼다. 핵심은 ‘영남권 공략’이다. 그중에서도 진짜 승부처는 PK다. 포스트 대선의 1차 관문인 민주당 8·29 전당대회에 앞서 PK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계의 전선을 흩트리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동시에 호남 필패론의 프레임을 깨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87년 체제 이후 7명의 대통령 중 호남 출신은 김대중 전 대통령(DJ)뿐이다.
이낙연 의원이 6월 1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 참석해 동료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호남 대통령론은 진보진영 딜레마다.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 차기 대선 후보는 두 개의 칼날 위에 서 있다. 하나는 ‘호남의 지지 없이는 당선될 수 없다’고, 다른 하나는 ‘호남만으로는 안 된다’다. 호남 대망론과 호남 필패론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진보진영의 차기 대선 후보 앞에 놓인 난제 중 난제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호남은 대선 승리의 입구”라면서도 “대선 승리의 출구는 영남”이라고 잘라 말했다. 진보진영의 대선 승리 방정식은 ‘호남 결집 후 영남 갈라치기’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PK가 1990년 3당(민주정의당·통합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 이전, 민주화 성지였다는 전제가 녹아있다. 개혁 전선을 통해 영남 표의 분열을 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영남 유권자가 호남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적 우위의 비밀’도 깔렸다. 21대 총선 기준으로, PK와 대구·경북(TK) 유권자는 약 1300만 명으로, 호남 유권자(512만 명)보다 2.5배나 많았다.
이 방정식을 가장 잘 풀어낸 정치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5%대 지지도에 불과했던 노 전 대통령을 대선 입구에 올려놓은 것은 ‘호남의 폭발적인 지지’였다. 2002년 3월 16일 민주당 광주 경선 당시 DJ의 정치적 기반인 광주는 민주당 경선 최대 승부처로 꼽혔다. 이곳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인제 대세론’과 ‘리틀 DJ’ 한화갑 후보를 단숨에 꺾고 1위를 차지했다. 노풍(노무현)이 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영남 출신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그해 제16대 대선 때 영남권에서 ‘30%대 득표율(부산 29.9%, 울산 35.3%, 경남 27.1%)’을 기록,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몰표를 저지했다. 노 전 대통령 호남 득표율은 90%(광주 95.2%, 전남 93.4%, 전북 91.6%)를 웃돌았다.
문 대통령도 19대 대선 때 영남권에서 30%대 후반(부산 38.7%, 울산 38.1%, 경남 36.7%)을 기록, 영남 갈라치기에 성공했다. 문 대통령의 영남권 득표율은 자유한국당 후보로 나섰던 홍준표 의원(부산 32.0%, 울산 27.5%, 경남 37.2%)을 앞질렀다. 호남 득표율이 60%대(광주 61.1%, 전남 59.9%, 전북 64.8%)에 불과했던 문 대통령이 낙승을 거둔 기저에는 PK 갈라치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PK 표를 흩트릴 수 있는 영남 후보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호남 후보인 이 의원으로선 ‘PK 공략’의 구미가 더욱 당길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 대선 방정식만 보면, 이 의원은 대선 입구에 가장 근접한 후보다. 경쟁자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도 지사의 출신지는 각각 경남 창녕과 경북 안동이지만, 이들의 정치적 기반은 수도권이다. 영남권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정치인은 김부겸 전 민주당 의원과 김경수 경남도지사 정도다.
의원총회에 참석한 이낙연 의원과 김태년 원내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관전 포인트는 ‘이낙연 PK 공략’이 미칠 파급력이다. 이낙연 맞수인 김부겸 전 의원의 정치적 기반은 PK가 아닌 TK다. 진보진영의 ‘영남분열 작전’이 지역주의가 공고한 TK보다는 PK에 방점을 찍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 전 의원의 영남 갈라치기 위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김 지사는 차기보다는 차차기 대선 주자에 가깝다. 영남권 공략 방아쇠를 당긴 이 의원으로선 ‘PK 후보가 없는’ 차기 대선판이 대권 여의주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도 PK 출신 후보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 의원의 PK 공략이 ‘친노·친문계 새판 짜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친노·친문계의 정치적 기반은 PK다. 이 의원이 8·29 전당대회를 앞두고 PK 친노·친문계에 러브콜을 보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의도 정치권 관계자는 “PK 친노·친문계의 특징은 충성도가 강하고 바람을 잘 탄다는 특성이 있다”며 “이 의원이 PK 공략에 실패한다면, 대세론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이 의원은 6월 11일 서울 모처에서 부산 지역의 여권 인사들과 만찬 회동을 했다. 앞서 재개한 ‘식사 정치’의 문호를 PK 친노·친문계에도 개방한 것이다. NY(이낙연)계와 PK 친노·친문계 간의 가교 역할은 배재정 전 민주당 의원이 맡았다. 배 전 의원은 이 의원이 국무총리를 지냈을 때 비서실장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배 전 의원은 NY계 사단으로 인식되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친문계’다.
PK 공략에 나선 이 의원 운명은 ‘당권파 친문계’가 쥐고 있다. 21대 총선의 PK 생환 3인방(전재수·박재호·최인호) 중 전재수 의원이 당권파 친문계다. 앞서 이 의원이 차기 당권에 시동을 건 이후 ‘NY계·당권파 친문계’의 전략적 연대설이 급물살을 탔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전 의원 행보는 이낙연 승부수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김영삼(YS)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박재호 의원은 김부겸 전 의원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김부겸 전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도 마찬가지다. 친문 직계가 주축이 된 ‘부엉이모임’ 핵심인 최인호 의원은 홍영표 의원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 당권 경쟁에 앞서 얼개를 드러낸 퍼즐은 ‘이낙연·전재수’, ‘김부겸·박재호’, ‘홍영표·최인호’ 조합이다.
국회 원 구성 협상 지연으로 6월 8일 일정이 취소됐던 민주당 코로나19극난극복위원회의(국난극복위) ‘영남권 간담회’도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국난극복위원장은 이낙연 의원이다. 이 자리에는 김경수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원조 친노’ 김두관 의원, PK 시·도당 위원장인 전재수(부산), 이상헌(울산), 민홍철(경남) 의원 등이 함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두관 의원은 같은 날 “7개월짜리 당 대표를 뽑으면 1년에 전당대회를 세 번 한다”며 “지금 미증유의 경제 위기가 도래한 상황인데 집권당이 1년 (동안) 전당대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이낙연 대세론’에 견제구를 날렸다. PK 친노·친문 공략에 나선 ‘이낙연 승부수’의 험로를 예고한 셈이다.
다만 이 의원이 PK 공략에 성공한다면, ‘대세론 주자에게 몰표’를 주는 호남의 전략적 지지를 단숨에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대로 이 의원이 PK 공략에 실패할 땐 ‘이낙연 흔들기 가시화→지지도 하락→필패론 부상→호남 민심의 전략적 지지 철회’ 등의 악순환에 빠진다. 이낙연 대세론의 운명은 PK 친노·친문계 손에 달렸다는 얘기다. PK 공략에 나선 이 의원은 최근 사실상 대선 캠프를 구축하면서 연일 광폭 행보를 하고 있다.
이 의원 측은 옛 민주당 산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건물에 140평 규모의 사무실을 내고 민주당 8·29 전당대회와 차기 대선 경선을 치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실무진 등의 인재 영입에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NY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이낙연 대세론이 일찌감치 전당대회 핵심 구도로 자리 잡자, 이낙연 때리기가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