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조선노동당 선선선동부 제1부부장. 사진=연합뉴스
6월 4일 김여정은 탈북민의 대북전단 살포에 강한 불쾌감을 표했다. 남북 군사합의 파기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김여정은 이날 발표한 담화를 통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삐라(대북 전단) 살포 등 모든 적대 행위를 금지하기로 한 판문점 선언과 군사합의서 조항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6·15(남북공동선언) 20돌을 맞는 마당에 이런 행위가 개인·표현의 자유로 방치된다면 남조선(한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봐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김여정이 거론한 ‘삐라’는 대북 전단을 일컫는 말이다. 5월 31일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은 김포에서 대북 전단 50만 장과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000장, 메모리카드 1000개를 대형 풍선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 대북 전단엔 “7기 4차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새 전략 핵무기로 충격적 행동하겠다는 위선자 김정은”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여정은 “나는 못된 짓을 하는 놈보다 못 본척하거나 부추기는 놈이 더 밉더라”며 문재인 정부를 겨냥했다. 이어 김여정은 “광대놀음을 저지할 법이라도 만들고 애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잡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한국 당국에 대북 전단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라는 식의 요구를 한 셈이다.
6월 9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규탄하는 북한 청년들의 학생시위행진 장면. 사진=연합뉴스
김여정 담화 직후 당·정·청은 한목소리로 전단 살포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청와대는 “대북 전단 살포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통일부는 “대북 전단 금지법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6월 8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대북 전단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백해무익하다”면서 “대북 전단 살포는 중지돼야 하며 정쟁의 소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북한 소식통은 “사실상 김여정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북한의 압박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북한 대외 선전매체 통일의메아리는 6월 11일 “평양과 백두산에서 두 손 높이 들고 무엇을 하겠다고 믿어달라고 할 때는 그래도 사람다워 보였고, 촛불 민심 덕으로 집권했다니 그래도 이전 당국자와는 좀 다르겠거니 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거론했다. 이어 이 매체는 “지금 보니 오히려 선임자들(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6월 11일 북한 기관지 노동신문은 한국 정부의 대응을 직접 거론했다. 노동신문은 “지금 적들(한국 당국)이 표면상으로는 마치 아차 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듯이 철면피하게 놀아대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루 한시도 우리 공화국(북한)을 무너뜨리려는 흉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노동신문은 “이번 사태는 분명 북남관계를 깨뜨리려고 작심하고 덤벼드는 우리에 대한 도전이고 선전포고와 같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압박은 ‘설전’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북한은 6월 9일 정오를 기점으로 한국과 이어진 연락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전 ‘북남 사이의 모든 통신·연락선들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조치를 취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연락 수단 차단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날 조선중앙통신은 “2020년 6월 9일 12시부터 북남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유지해오던 북남 당국 사이의 통신연락선, 북남 군부 사이의 서해통신연락선, 북남통신시험연락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와 청와대 사이의 직통통신 연락선을 완전 차단·폐기하게 된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은 ‘핫라인’이라고 불리는 양국 지도자간 연락선까지 차단함으로써 압박 강도를 높였다.
한 북한 전문가는 통화에서 “북한이 이례적으로 강력한 압박을 하고 있다”면서 “특히 ‘백두혈통’ 일원인 김여정이 직접 나서 한국 정부를 향해 가시를 세운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이 전문가는 “대북 전단 살포가 북한 입장에서 눈엣가시인 것은 맞지만, 김여정의 ‘직설’ 비난은 다른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포석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여정 담화 일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김여정은 “만약 남조선 당국이 응분의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금강산관광 폐지에 이어 쓸모없이 버림받고 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 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 하지 않은 공동연락사무소 폐쇄가 될지, 있으나마나한 북남군사합의 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해둬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적막감이 감도는 개성공단. 사진=연합뉴스
북한 전문가는 “김여정이 개성공단 철거를 언급한 뒤 연락사무소 폐쇄와 군사합의 파기 등 총 세 가지 사안을 거론했다”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북한 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고, 연락사무소 폐쇄와 군사합의 파기는 지금 당장 재압박용으로 들이밀 수 있는 카드였다”고 했다. 그는 “연락사무소는 폐쇄가 됐고, 다음은 군사합의 파기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결국 북한이 한국 정부에 원하는 최종적 조치는 개성공단 재가동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전문가는 “북한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시설 철거를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 이 시설들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이뤄지긴 어려울 것”이라면서 “북한 내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경제 자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린하이동 중국 반도문제연구소 논설위원도 6월 9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개성공단은 북한이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압박 카드”라면서 “연락사무소 폐쇄와 군사합의는 추후 (개성공단) 개발을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린 논설위원은 “현재 상황에서 북한의 진짜 목적은 개성공단을 철거하는 대신 (개성공단을) 다시 유용하게 만들고 재산의 원천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분석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북한의 공세는 계속됐다. 노동신문은 6월 11일 “선의와 아량에도 한도가 있는 법”이라면서 “선의에 적의로 대답해가는 남조선 당국자들이야말로 인간의 초보적인 양심과 의리마저 상실한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한국 정부를 저격했다. 노동신문은 “세계와 민족 앞에 약속한 역사적인 선언을 파기하고 군사합의서를 휴지장으로 만든 이번 사태는 분명 북남관계를 깨뜨리려고 작심하고 덤벼드는 우리에 대한 도전이고 선전포고나 같다”면서 강한 어조를 이어갔다.
또 노동신문은 “후에 판이 어떻게 되든 간에 북남관계가 총파산된다 해도 남조선 당국자들에게 응당한 보복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민의 철의 의지”라고 했다. 한국 당국의 대처 여부와 상관 없이 강력한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답은 정해져 있고, 한국 정부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식”이라면서 “아직 한국 정부가 북한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 정부가 압박 수위를 높여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한국의 당·정·청이 대북 전단 살포를 제재하는 방안에 대해 신속하게 대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더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면서 “결국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가 최종적으로 북한이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