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박선영 아나운서 얘기를 듣게 됐다. 그녀를 화려하게 포장해주었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그만둔 이유를. 지금이 아니면 용기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사표를 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를 알아가고 ‘나’를 찾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그녀의 심지를 본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 보장된 화려한 자기를 벗어버리는 일은 용기고, 어리석음이다.
누구에게나 용기는 어리석음과 결합한다. 어쩌면 어리석음은 세상의 문법이 아닌 ‘나’의 문법이고, ‘나’의 문법으로 세상을 배우고 살고자 하는 자의 몸부림일 것이다. 그 몸부림 없이 ‘나’의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사루는 인도 태생이다. 5세 때 기차역에서 형을 잃어버리고 빈 기차에 올라 2박 3일, 엉뚱한 곳에서 고아가 된 바람에 호주로 입양되었다. 그를 입양한 호주 부모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어서 그는 부족한 것이 없이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움이 그를 미친 듯 떠돌게 했다. 그의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그는 이런 절규의 말을 던진다.
“엄마와 형이 날 찾고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내 형이 얼마나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까. 그런데 난 발을 뻗고 자, 그게 구역질이 나!”
‘나’를 알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사람들, 그 식구들을 찾지 못해 그는 방황하고 마침내는 그를 잘 키워준 호주 엄마에게까지 그 방황을 들키고 만다. 그와 ‘만토쉬’를 입양한 호주 엄마와의 대화가 찡하다.
“엄마의 불임이 안타까워요. 우리가 백지상태로 온 것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낳았으면 달랐을 텐데, 우리가 엄마를 괴롭히는 기분이에요.”
“나는 불임이 아니었어. 세상엔 사람이 너무 많아. 아이를 낳는 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힘든 아이들을 거둬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거지.”
참 좋은 엄마다. 그런 엄마와의 인연도 ‘나’의 방황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방황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어찌할 수 없는 몸부림, 어리석은 몸부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를 알아가는 징검다리니까. 호주 가정에 함께 입양된 만토쉬는 평소엔 착하기 그지없는데, 조그마한 자극에도 화를 폭발하고 마약을 끊지 못한다.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고립되어 있다.
생이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물음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사루는 자기를 던져 자기가 나온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반면 만토쉬는 그 물음 앞에서 좌절한 것 같다. 그런 물음을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만토쉬처럼 자해하게 되거나 신경증에 걸리게 되는 것 같다.
사루는 엄마가 돌을 깨는 일을 했다는 기억에 기대, 마침내 인도 가족을 찾아낸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사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늙어간 인도 엄마는 기적처럼 찾아온 아들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놀랐고, 바다처럼 깊은 행복을 느꼈다고 전한다.
찾았다고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잘살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어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잘 수 있고 거칠 것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있다. 그곳이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자리가 아닐까.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삶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갈 수 있어야 그 때문에 버려졌던 것들을 돌볼 수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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