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은 그간 탈북민의 존재 자체를 숨기기 바빴다. 그러나 이번 담화에서 김여정은 탈북민을 ‘쓰레기’, ‘똥개’ 같은 거친 단어로 비하했다. 북한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을 통해서 ‘백두혈통’이라 불리는 김여정이 탈북민을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사진=일요신문DB
김여정은 6월 4일 담화에서 “5월 31일 ‘탈북자’라는 것들이 전연 일대에 기어 나와 수십만 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 측(북한) 지역으로 날려 보내는 망나니짓을 벌려놓은 데 대한 보도를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함부로 우리 최고존엄(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라고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노동신문도 6월 11일 보도를 통해 “우리 인민의 분노는 하늘에 닿고, 참을성은 한계를 넘어섰다”면서 “우리는 최고존엄과 사회주의 제도를 감히 어째보려고 발악하는 자들은 그가 누구이건 어떤 가면을 쓰고 어디에 숨어있건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적발해 무자비한 징벌을 안길 것”이라고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노동신문 역시 탈북민들을 신랄한 단어에 빗대 비난했다. 노동신문은 탈북민을 ‘미친개’라고 했다. 노동신문은 “미친개는 사정 보지 말고 몽둥이로 조겨대야(두들겨 패야) 하는 것처럼 이따위 인간쓰레기들은 모조리 박멸해 치워야 한다”며 “그래야 후환이 없다”고 했다.
이어 노동신문은 한국 정부는 탈북민을 감싸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다. “남조선(한국) 당국은 당치도 않은 구실을 내대며 인간쓰레기들이 벌려놓은 반공화국 삐라(대북 전단) 살포 망동을 감싸지 말아야 하며, 초래된 파국적 사태에 대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최근 들어 ‘당 중앙’이란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김여정과 북한 기관매체, 대외 선전매체까지 탈북민을 ‘콕’ 집으며 열띤 비판을 이어가는 양상이다.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태구민) 미래통합당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탈북민 출신으로 국회에 입성한 태영호(태구민) 미래통합당 의원은 김여정 담화 관련 입장문을 통해 북한 당국이 탈북민의 존재를 직접 거론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분석했다. 태 의원은 “북한 최고존엄의 여동생이 북한 주민들도 다 보는 노동신문을 통해 탈북민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고 했다.
태 의원은 “내 기억엔 김씨 일가가 말한 탈북민이란 단어는 (여태까지) 북한 공식 매체에 보도된 적이 없다”면서 “탈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북한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태 의원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2018년 판문점 회담에서 김정은이 탈북민을 언급해 한국 언론에 보도가 됐다”면서 “그러나 북한 언론에선 (이런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태 의원 말처럼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탈북민을 거론한 것은 ‘돌발 행동’이었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북한 내부 경제 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면서 “지금 북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 경제 문제”라고 귀띔했다. 소식통은 “북한이 탈북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까지 한국 정부를 압박해야 했을 이유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북한 전문가도 “김정은을 비방하는 대북 전단 살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면서 “그런데 이번엔 북한이 탈북민의 정체를 북한 주민들에게 공개하면서까지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했다. 이 전문가는 “북한 당국이 치부를 드러내는 협상 카드까지 활용해서 한국 정부와 ‘밀당(밀고 당기기)’을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일 수 있다”면서 “통상적으로 북한이 극단적인 협상 태도를 취할 때는 그만큼 원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방증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