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한 김종인 비대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거침없이 좌회전
미래통합당은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면서 평등 정책에 대해서는 인색한 입장을 보여 왔다. 문재인 정부 여러 정책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기본소득제를 제안하는가 하면, 고용보험 확대와 전일보육제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통합당이 과거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다.
김 위원장은 취임 전 이미 ‘거침없는 좌회전’을 예고했다. 취임 직전인 5월 27일 전국 조직위원장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당이 시대정신을 못 읽었다.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더니 당에서 ‘이건희 손자까지 공짜 밥을 줘야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희 손자가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느냐”며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는 보수정당의 행동을 꼬집었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정책이 무엇인지를 읽지 못했고 ‘애들 밥 주기 싫어하는 정당’이 됐다는 것이 김 위원장 생각이다.
이어 김 위원장은 조직위원장들을 앉혀 놓고 좌회전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국민은 더는 이념에 반응하지 않는다. (국민을) 보수냐 진보냐 이념으로 나누지 말자”고 했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었으니 당의 정강·정책부터 시대정신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놀라지 말라”고 했다. 국민들이 깜짝 놀랄 만한 정책을 내놓고 이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김 위원장은 6월 4일 비대위 회의에서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며 기본소득을 공론화했다. 과거 통합당이 포퓰리즘으로 몰아세웠던 기본소득도 과감히 통합당 정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열린 입장을 내보인 것이다.
김 위원장이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을 오가며 여러 선거를 치러본 ‘선거 전문가’여서 좌회전 정책을 통해 진보정당의 주무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 정책화는 하지 않더라도 이슈 선점 효과는 물론, 민주당 정책을 김 빠진 사이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파고드는 ‘평등 정책’도 김 위원장 노림수다. 김 위원장은 6월 11일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교육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있고, 사교육 시장이 커져서 공교육이 무력화되고 있다.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당에선 교육 불평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통합당은 이를 과감히 지적하고 선제적으로 개선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며 민주당 ‘평등 정책’의 약점을 지적했다.
통합당 한 다선 의원은 “김종인 위원장이 ‘40대 경제전문가 대선 후보’를 들고 나와 큰 재미를 봤다. 그게 누군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며 통합당을 자꾸 쳐다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에게 실제 물었더니 ‘그런 사람 없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메시지를 던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고 정확하게 효과를 봤다. 지금 김 위원장의 행보는 급격한 좌회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통합당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발산하려는 것이고 이 부분에서는 합격점”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성능 좋은 브레이크를 갖추고 절제된 좌회전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참모를 보면 이를 읽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비서실장으로 기획재정부 예산실장과 차관을 역임한 송언석 의원을 임명했다. 빠른 속도의 좌회전을 제어해줄 브레이크다. 김 위원장이 속사포처럼 다양한 복지를 쏟아낼 때 이에 필요한 재원마련 방안에 대해 조언해줄 수 있는 참모로 꼽힌다.
#필요하면 우회전
김 위원장이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좌회전을 하지만 대한민국이 죽고 사는 문제, 안보에 대해서는 우회전을 하고 있다. 집토끼 공략 일환으로 읽힌다.
김 위원장은 일부 여권 인사들이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의 친일행적을 얘기하며 사후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6월 9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얘기”라고 맞받았다. 김 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6·25 전쟁 70주년 회고와 반성’ 세미나에 참석해 “백 장군은 낙동강 전선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분이 대한민국 존립을 위해서 참 엄청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할 것 같으면, 그와 같은 (장지) 논란은 참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에 대해서도 일침을 놨다. 그는 “동족이기 때문에 북한과 좋은 관계를 갖고 협력을 한다는 점에서는 거부할 사람이 없다”면서도 “일방적으로 북한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갖은 욕설을 다 들어가면서 아무렇지 않은 양 그냥 지나간다는 것은 국민들이 묵과할 수 없다”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비난 담화가 나오자 여권에서 대북 전단살포 금지법을 추진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6월 8일 비대위 회의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정부 스스로 판단해 북한에 (전단 살포용) 풍선 띄우는 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조치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김여정이) 그것을 공격했다고 해서 즉시 답을 보내는 것은 현명치 못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비대위 회의에서도 “김여정 부부장 담화에 왜 우리 정부가 아무런 대응을 못 하고 있는지 상당히 의아하다. 정부는 대북 관계에서 좀 분명한 태도를 표명함으로써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 일방적으로 북한에 끌려다니는 나라가 돼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안보에서 우회전하는 모습을 보인 김 위원장은 이어 자신의 정책이 ‘탈보수’가 아님까지 강조하며 핵심 지지층에 대한 안심 전략을 이어갔다. 6월 10일 비대위-중진연석회의 참석자들은 김 위원장이 이 자리에서 자신의 취임 초반 언행에 대해 “보수의 가치를 부정한 게 아니다”라는 설명을 내놨다고 전했다. 이어진 수도권 강원지역 초선 대상 오찬에서도 “보수를 쓰지 말라 한 것이지 보수를 버리라고 한 적은 없지 않으냐. 외연 확장을 위해 한 말”이라고 재차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바람, 미풍일까 강풍일까
6월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 21대 국회 개원 기념 특별강연에서 강연하고 있는 원희룡 제주지사. 사진=연합뉴스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6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제의 본질은 사회주의 배급제도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김 위원장의 좌회전 정책을 사회주의로 몰아붙였다. 홍 의원은 “기본 소득제가 실시되려면 세금이 파격적으로 인상되는 것을 국민들이 수용해야 되고 지금의 복지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현명한 스위스 국민들이 왜 기본소득제를 국민 77%의 반대로 부결시켰는지 알아나 보고 주장들 하시는지 참 안타깝다. 코로나19로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회생시킬 생각은 않고 사회주의 배급제도 도입 여부가 쟁점이 되는 지금의 정치 현실이 참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유승민 전 의원 입지도 좁아지고 있다. 자신이 주장해온 보수개혁 구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수위의 변화를 김 위원장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6월 9일 “진보의 아류가 돼선 영원히 2등이고,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고 김 위원장을 겨냥했지만, 응원군이 많아지기보다는 김 위원장으로부터 “공부 좀 하라”는 핀잔만 들었다.
통합당 한 중진 의원은 “김 위원장이 좌우를 넘나들며 주목도를 높이는 추세를 이어가면서 당의 지지율 상승세가 눈에 보이고 있다. 정치판은 어차피 지지율에서 승패가 갈리고 세력이 갈린다. 이렇게 되면 결국 김종인 위원장 손에서 대권 후보가 점지되는 수준까지 갈 것”이라며 “당 안팎 보수 대선 잠룡들의 긴장도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