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휘몰아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은 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 V리그는 코로나19로 시즌을 중단한 최초의 프로스포츠였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는 일정을 마치지 못한 채 종료됐고 플레이오프는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V리그는 코로나19로 세계 최고 스타 김연경을 품에 안게 됐다.
‘배구여제’ 김연경이 11년 만에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사진=박정훈 기자
터키에서 활약하던 김연경은 지난 4월 코로나19를 피해 귀국했다. 곧 V리그 복귀를 타진한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결국 ‘친정팀’ 흥국생명의 분홍색 유니폼을 11년 만에 입게 됐다.
세계 모든 프로스포츠가 그렇듯 배구 리그도 재개 시점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V리그는 매력적인 무대가 됐다. 지난 5월부터 이미 프로야구 KBO 리그와 프로축구 K리그가 개막했고 겨울스포츠의 차기 시즌 개막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연경은 지난 10일 열린 입단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로 해외 상황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리그가 재개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며 “한국은 방역시스템 속에 프로스포츠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 복귀가 경기력을 유지하는 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결정했다”고 밝혔다.
해외에 비해 코로나19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국내 상황 덕에 김연경이 복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사진=박정훈 기자
김연경과 흥국생명이 다시 손을 잡기까지 11년이 걸렸다. 2005년 프로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김연경은 4시즌 동안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를 평정했다. 데뷔와 동시에 압도적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신인왕, 정규리그 MVP, 챔피언결정전 MVP를 동시에 석권하는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4시즌 동안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결정전 우승, MVP 수상을 각각 3회씩 달성한 김연경에게 V리그는 좁았다. 프로 입단 5년차부터 일본 V리그에 진출했다. 일본에서도 김연경의 활약은 돋보였다. 소속팀 JT 마블러스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활약하는 2년 내내 팀을 정규리그 1위에 올려놨다.
국제적 스타로 올라선 김연경의 활약 무대는 터키로 이어졌다. 2011~2017년 페네르바흐체 SK 소속으로 나서는 대회마다 우승을 달성했다. 터키리그 우승은 물론 유럽배구연합(CEV) 여자배구 챔피언스리그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MVP 트로피는 덤이었다.
2017-2018시즌에는 중국으로 행선지를 돌렸다. 상하이 브라이트 소속으로 적응 기간 없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새로운 팀에서도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우승 청부사’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간발의 차로 준우승에 머물며 아쉬움을 남겼다.
중국에서 1년간 활약 이후 다시 익숙한 터키 무대로 돌아갔다. 페네르바흐체가 아닌 엑자시바시와 계약을 맺고 2시즌간 활약했다. 터키컵, 터키 슈퍼컵 등 대회에서 우승 경력을 추가했다.
#흥국생명과 질긴 인연
김연경은 15년 전 고교 졸업도 하기 전에 ‘프로’ 타이틀을 달았던 친정팀 흥국생명의 유니폼을 입는다. 좋은 추억과 악연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만남에 많은 눈길이 쏠렸다.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입단 직전 시즌, 단 3승(13패)으로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던 팀을 신인 선수 김연경은 우승으로 이끌었다. 4년간 활약 이후 일본, 터키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흥국생명 소속으로 해외에 ‘임대’된 신분이었다.
이 같은 상황이 김연경의 발목을 잡았다. 임대와 관련한 V리그 규정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FA(자유계약) 자격 획득을 놓고 2012년부터 약 2년간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 해외 이적을 놓고 교통정리가 원활치 않자 김연경은 ‘국가대표 은퇴’를 불사했고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김연경 사태’가 이슈로 떠올랐다.
국제배구연맹(FIVB)까지 나서며 김연경이 터키에서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지만 흥국생명은 결국 김연경을 구단 동의 없이 국내 타구단과 계약할 수 없도록 하는 ‘임의탈퇴’로 묶으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2012년 소속팀과 갈등을 빚었던 김연경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김연경의 선택은 3억 5000만 원
양측은 2020년 여름, 다시 웃으며 손을 잡았다. ‘세계 최고 연봉 배구선수’라는 수식어가 달리기도 했던 김연경은 연봉 협상에서도 화제를 낳았다. 10억 원대 후반에서 최대 20억 원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김연경은 오는 2020-2021시즌 흥국생명 소속으로 3억 5000만 원을 받는다. 기존 연봉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V리그 여자부의 경우 한 구단이 선수 연봉으로 지급할 수 있는 금액(샐러리캡)은 18억 원. 각종 수당 등 옵션을 포함해도 23억 원이다. 김연경 1명의 연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다. 이외에도 선수 1명에게 지급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7억 원(옵션 포함)으로 제한한 규정도 있다.
문제는 흥국생명의 기존 연봉 지출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 여름 FA 최대어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에 10억 원을 투자했다. 나머지 금액을 김연경에게 몰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권인 3위에 올랐다. 김미연, 김세영, 박현주, 이주아 등 수준급 선수들에게도 만족할 만한 연봉을 줘야 했다.
김연경의 선택은 3억 5000만 원이었다. 흥국생명은 예우 차원에서 6억 5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기존 선수들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뜻을 협상 중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해외 다른 구단 관계자나 배구 에이전트들이 이번 연봉을 보고 놀라더라”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연봉 삭감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올림픽 메달’ 목표를 틈만 나면 언급해왔다.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내고 미소짓는 김연경과 국가대표 동료들. 사진=국제배구연맹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김연경이 국내로 복귀하리라는 예상을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터키 리그에서 여전히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국내 무대와 연봉 격차도 컸기 때문이다. 10억 원 이상의 연봉 삭감, 갑작스런 국내 복귀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올림픽. 김연경은 틈만 나면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지냈다. 가는 팀마다 우승을 차지했고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 금메달, 월드컵 6위, 월드그랑프리 8위 등 성적을 냈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아 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4위로 메달 획득을 눈앞에서 놓쳤기 때문이다.
한국, 일본, 터키, 중국 등에서 다양한 유니폼을 입었지만 국가대표 유니폼은 그에게 가장 특별하다. 2017년 돌연 중국으로 향한 이유도 ‘국가대표 소집을 위해’ 한국과 가까운 거리를 택한 것이다. 이듬해 페네르바흐체 유니폼을 입으면서도 국가대표 차출을 염두에 두어 체력 안배와 관련한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여름으로 예정됐던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 탓에 1년 뒤로 미뤄졌다. 이에 초점을 맞춰 김연경은 고액 연봉도 마다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현재 배구 선수로서 올림픽을 가장 크게 생각한다”면서 “1년 뒤 최고의 컨디션으로 마지막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