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는 노태형(가운데)의 끝내기 안타로 연패 기록을 ‘18’에서 멈췄다. 사진=연합뉴스
그렇다고 다음 날 마음먹은 대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패 기간이 늘어날수록 속은 더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어느새 선수단 전체가 패배의식에 젖는다. 그래서 또 다른 전직 감독은 말했다. “연패를 탈출하는 비법은 아무것도 없다. 방법은 ‘승리’ 단 하나뿐이다. 그냥 그게 전부다.”
#35년 만에 타이기록 나온 역대 최다 ‘18연패’
지금까지 수많은 팀들이 길고 짧은 연패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강팀이든 약팀이든 예외는 없다.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만한 연패를 기록한 팀도 여럿 나왔다. 역대 최다 연패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당했던 18연패.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이겼지만, 그 후 18경기를 내리 졌다.
올해는 그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한 팀도 나왔다. 35년 만이다. 한화 이글스는 지난 5월 23일 창원 NC 다이너스전부터 6월 12일 대전 두산 베어스전까지 18경기를 모두 져 삼미의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시즌 초반 팀을 지탱하던 선발진이 조금씩 무너지고, 외국인 선수들이 부상으로 쉬거나 부진에 빠졌다. 타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타격 슬럼프를 겪었고, 주전 내야수 2명이 같은 날 한꺼번에 부상으로 이탈했다.
NC전에서 연패를 시작한 한화는 결국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키움 히어로즈, NC와 3연전을 차례로 싹쓸이당했다. 14연패 시점에선 한용덕 감독이 끝내 중도 퇴진하고 퓨처스(2군) 사령탑이던 최원호 감독대행이 1군을 이끌게 됐다. 최 감독대행은 코칭스태프를 대거 교체하고 1군 엔트리에 있던 베테랑 선수 10명을 한꺼번에 2군으로 내리는 초강수를 뒀지만, 그 후에도 연패 4개가 늘어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심지어 역대 최다인 19연패 기록이 걸린 6월 13일 대전 두산전에선 비로 3회말 서스펜디드 경기가 선언되는 우여곡절까지 겪었다. 이튿날인 14일 3-4로 뒤진 3회말부터 다시 경기를 이어 간 한화는 6-6으로 무승부가 유력해 보이던 9회말 2사 2·3루서 올해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온 7년차 무명 내야수 노태형이 상대 소방수 함덕주를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좌전 적시타를 터뜨리면서 길고 길었던 연패 사슬을 끊었다. 비록 현존 구단 최다 연패 기록은 보유하게 됐지만, 역대 최약체팀 삼미를 지워버리는 통산 최다 연패 신기록의 불명예는 가까스로 피했다.
#감독이 공개 사과까지 한 KIA의 16연패
그 다음으로 긴 연속 패배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17연패다. 1999년 8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어둠의 역사를 남겼다. 쌍방울은 이 시즌을 끝으로 팀이 해체됐다. 2002년엔 롯데 자이언츠가 6월 2일부터 26일까지 16연패에 빠졌다.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였다. 그해 시즌 최종전에는 당시 3만 명 규모였던 사직구장에 관중 69명이 입장했다. 2010년대 들어서 연패로 가장 고생했던 팀은 KIA 타이거즈와 한화다.
KIA는 2010년 롯데의 16연패와 타이를 이루는 고난을 겪었다.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팀이었기에 더 충격적인 결과. 창단 이후 가장 참혹했던 22일이었다. 에이스 윤석민의 부상과 함께 시작됐다. 2010년 6월 18일 인천 SK전. 4연승을 달리던 KIA는 윤석민이 8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해 3-1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내내 불안했던 불펜을 의식해 9회에도 윤석민을 다시 올린 게 화근이 됐다. 윤석민이 주자를 내보냈고, 불펜은 끝내기 패배를 허용했다. 공 132개를 던지고도 완투승 목전에서 승리를 날린 윤석민은 울분이 치솟았다. 공을 던지는 오른손으로 라커룸 문을 세게 치다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그 후 KIA의 날개도 꺾였다. 아퀼리노 로페즈가 다음날 5⅓이닝 9실점으로 무너졌다. 그 다음날은 상대 에이스 김광현에게 완봉패를 당했다. 5회까지 팽팽하게 맞서다 후반 불펜 싸움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이어진 두 경기에선 각각 4회까지 0-7, 3회까지 0-9로 일찌감치 승기를 내줬다. 그 다음엔 상대 간판타자에게 쐐기 3점 홈런을 맞았고, 또 그 다음엔 2회 한 이닝에만 연속 6안타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 사이 2000년 해태가 기록한 역대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최다 연패 기록(9연패)을 넘어섰다. 10연패로 새 역사를 쓰던 날, 설상가상으로 중심 타자 최희섭이 발목 부상까지 당했다.
연패를 끊을 기회는 있었다. 11연패를 찍었던 6월 30일 광주 SK전서 7회까지 5-2로 앞섰다. 그런데 1점 더 쫓긴 8회 2사 만루서 마무리 투수 유동훈이 동점 적시타를 맞았다. 결국 연장 11회에 5점을 내줘 5-10으로 졌다. 다음날 내민 곽정철 깜짝 선발 카드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현종이 시즌 최악의 피칭을 한 데다 로페즈는 1회부터 홈런을 맞고 또 무너졌다. ‘뭘 해도 안 되는’ 시기였다.
7월 8일 잠실 두산전. KIA는 다시 2-5로 져 연패를 ‘16’으로 늘렸다. 경기가 끝나고 광주로 돌아가려던 선수단 버스를 팬들이 막아섰다. 조범현 감독이 탄 승용차를 둘러싸고 패배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대치 상황이 20분간 계속됐다. 결국 조 감독이 차에서 내려 팬들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며 최선을 다짐한 뒤에야 길이 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 청문회. 광주로 내려가는 선수단 버스 안에는 참담한 기운이 흘렀다.
조 감독은 광주구장에 돌아오자마자 감독 전용 의자를 더그아웃에서 치웠다. 한눈에도 불편해 보이는 허름한 의자를 갖다 놓았다. 선수들은 다음 날 평소보다 야구장에 일찍 나왔다. 배팅케이지 2개를 설치하고 열심히 배팅 훈련을 했다. 홈 팬들은 ‘그대들 곁엔 우리가 있지 아니한가’ ‘오늘부터 연승하면 타이거즈 우승이다’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서울에서 수모를 당하고 온 선수단을 감싸 안았다.
7월 9일 광주 한화전. 결국 KIA는 16연패 악몽에서 벗어났다. 3회 2점을 먼저 내줘 또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4-2 역전에 성공했다. 2점 리드 상황에서 7회 2사 2·3루 위기가 닥치자 더그아웃에는 한국시리즈 7차전 못지않은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다행히 이번엔 22일 만의 승리가 KIA를 찾아왔다.
KIA의 상징과도 같았던 베테랑 이종범은 이 경기에서 한·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백전노장인 그도 “나조차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어떻게 연패를 끊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후배들과 팬들에게 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고 토로했다.
승리투수가 된 양현종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무조건 연패를 끊으려고 던졌다”고 했고, 동점홈런을 날린 나지완은 “연패 기간 중에는 팬들께 죄송해서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KIA는 어렵게 그 터널을 빠져 나왔지만, 결국 그해 5위로 내려 앉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KBO 통산 최다승,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김응용 감독도 지독한 연패를 경험한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삭발로 얼룩지고 눈물로 빛난 한화의 13연패
2013년 4월. 한화는 막 새 시즌을 시작한 KBO리그를 ‘연패’라는 단어로 뜨겁게 달궜다. 백전노장 김응용 감독이 8년 만에 현장에 복귀해 한화 지휘봉을 잡은 첫 해. 개인 통산 1476승을 올렸던 명장은 그러나 1477번째 승리를 얻기 위해 무려 14경기를 더 치러야 했다.
KIA가 그랬듯, 연패는 늘 예기치 못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3월 30일 롯데와 부산 개막전. 한화는 9회초까지 5-4로 앞섰다. 세 타자만 아웃시키면 시즌 첫 승이 가능했다. 그러나 9회말 마지막 수비 때 롯데 전준우의 3루수 쪽 땅볼 타구가 베이스를 맞고 크게 굴절됐다. 이른바 ‘베이스의 저주’가 시작된 셈이다. 곧이어 동점 적시타와 끝내기 희생플라이가 나왔다. 5-6 역전패. 선수들은 훗날 “사실 첫 경기부터 뭔가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개막 8연패가 이어지자 한화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역대 개막 최다 연패는 2003년 롯데의 12연패다. 설마 그 기록을 넘겠느냐”고 했다. 그 믿음은 곧 무너졌다. 한화는 계속 졌다. 11연패 위기에 빠지자 선수들은 고참부터 신인까지 모두 머리를 짧게 깎고 야구장에 나왔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롯데의 기록은 깨졌다.
4월 16일 대전 NC전. 한화는 또 2회까지 4점을 줬다. 또 다시 패배의 기분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후 집중력을 발휘했다. 주장 김태균이 역전 2점 홈런을 쳤다. 6-4 승리. 시즌 14번째 경기에서 드디어 시즌 승수가 ‘1’로 바뀌었다. 김응용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를 하다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한국시리즈에서 수없이 우승을 해도 울지 않던 김 감독이 시즌 첫 승의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선수들에게 미안하다. 감독이 잘못해서 계속 졌다. 프로야구 감독을 20여 년을 했는데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김태균도 울먹였다. “주장으로서 그동안 굉장히 힘들었다”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울컥했다. 그는 이내 “후배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첫 승을 했으니 이제 선수들이 야구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화 선수의 아내들 역시 첫 승 직후 서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울었다는 후문이다.
물론 누구보다 기뻤던 건 한화 팬들이다. 특히 일명 ‘한화 눈물녀’의 모습과 후일담은 훈훈한 감동을 안겼다. 한화가 13연패 탈출을 확정하던 순간, TV 중계 화면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성팬 2명이 클로즈업됐다. 이 팬들은 경기가 끝나기 직전부터 선수들이 승리의 인사를 건낼 때까지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화 구단은 다음날 공식 SNS를 통해 그 주인공을 수소문했고, 찾아냈다. 5월 19일 대전 두산전에서 ‘네버 포겟 더 티어스(그날의 눈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열고 그 팬들을 시구자와 시타자로 초청했다. 이날 지정석을 제외한 내·외야 1만 2000석 전 관중은 무료로 입장했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구단이 입장료 전액을 부담했다. 쓰라렸던 13연패의 아픔은 그렇게 구단과 팬의 화합으로 막을 내렸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