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영결식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롯데그룹의 1분기 실적이 고꾸라졌다. 호텔롯데는 1분기 매출이 9284억 원으로 2019년 1분기보다 30% 이상 감소했고, 309억 원 영업손실을 냈다. 같은 기간 롯데쇼핑은 영업이익이 521억 원으로 74.6% 급전직하했다. 롯데케미칼은 매출이 3조 2756억 원으로 2019년 1분기보다 9.62% 줄었고, 적자로 돌아서며 860억 원 영업손실이 났다.
계열사 전반의 실적 악화가 우려되자 롯데그룹은 가장 먼저 구조조정 카드를 빼들었다. 롯데쇼핑은 1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백화점, 마트, 아울렛 점포 중 30%인 200여 곳을 장기적으로 폐점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연내에만 롯데쇼핑은 백화점 5개 점포, 마트 16개 점포 등을 폐점할 계획이다. 직원들의 반발은 상당하다. 롯데그룹 실적 악화는 중국 진출 실패와 경영 환경에 대응하지 못한 탓인데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그 책임을 직원들에게 전가한다는 이유에서다.
마트산업노동조합 롯데마트지부(노조)는 지난 11일 1인 시위를 열고 ‘구조조정 중단’과 ‘폐점사원 인근점포 발령’을 요구했다. 노조는 롯데쇼핑이 일산에 사는 롯데마트 직원을 출퇴근 시간만 4~5시간 걸리는 양평, 송도 점포로 재배치해 사실상 해고 통지를 한 셈이라고 주장한다. 롯데쇼핑 측은 “폐점포 인원을 최대한 인근 점포로 재배치한다는 원칙이지만 현장 상황상 직원들이 원하는 대로 다 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롯데그룹은 주력 사업인 유통 부문이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은 데다 상장을 준비해온 호텔롯데의 실적 악화로 더욱 고심이 깊다. 호텔 부문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정상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신동빈 회장이 새 먹거리로 삼은 롯데케미칼은 3월 대산공장 화재 등 여파로 어닝쇼크를 맞았다. 악재가 겹치며 신동빈 회장의 경영책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M&A의 귀재로 평가받는 신 회장이 또 다시 기업 인수를 통해 신사업에 진출하고,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신 회장 역시 지난 3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일본 석유화학 기업 M&A를 추진할 생각”이라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시장에서는 롯데그룹이 롯데케미칼을 앞세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재계는 롯데그룹의 경영정상화나 신사업 진출에 우려를 내비친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호텔롯데 상장이 더 어려워진 게 가장 큰 문제로 보인다. 경영권 분쟁 불씨도 아직 해결된 게 아니다”라며 “투자업계에서 롯데의 배터리 사업 진출을 기대하는 것과 달리 현재 상황은 어느 기업이라도 M&A에 나서기 애매하다”고 말했다.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해임안을 제출했다. 사진=롯데의 경영 정상화를 요구하는 모임 캡처
경영권 갈등도 재점화될 조짐이 보인다. 오는 6월 말 일본 롯데홀딩스의 주주총회가 열리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일본의 입국제한 문제로 신동빈 회장의 주총 참석은 쉽지 않다. 신 회장은 롯데홀딩스 지분을 4% 정도만 보유하고 있어, 친형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측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 주주의 우호표가 꼭 필요하다. 주총에 앞서 주주 챙기기에 나서야 하는 신 회장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면 그동안 조용했던 신동주 전 부회장은 다시금 공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4월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와 범죄사실이 입증된 사람은 임원진이 될 수 없다는 정관변경안을 제출했다. 신 회장에 대한 해임안은 이번이 6번째로, 앞서 제기된 해임안은 모두 부결됐다. 하지만 롯데그룹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 신 회장이 2019년 10월 대법원으로부터 뇌물공여와 배임죄 등 경영비리 혐의를 유죄로 확정받은 탓에 이번에도 주주들이 신 회장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롯데그룹 측은 “신 회장의 일본 주총 참석은 아직 확정된 바가 없다”며 “신동주 전 부회장은 그룹 외부 인사라 그와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6월 ‘롯데의 경영 정상화를 요구하는 모임’이라는 일본 사이트를 재개하고 신동빈 회장의 임원자격 자체를 문제 삼고 나섰다. 거대한 유통기업의 대표이사가 법적으로 유죄를 확정받고도 직을 유지하는 게 상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다. 신 회장은 대법원 선고 이후 롯데건설, 롯데칠성음료 등 일부 국내 계열사 사내이사직에서 내려왔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신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직을 유지하는 명분도 약화된다.
롯데그룹 측은 신동빈 회장의 사내이사직 사임 배경에 대해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다중겸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동빈 회장은 유죄를 받아 국내법상 특정 분야의 사업 유지가 불가하자 이사직을 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주세법상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집행이 끝난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않은 자는 주류 면허를 받을 수 없다. 부동산개발업법에서도 배임으로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고 집행이 종료된 날부터 3년이 지나지 않으면 부동산개발업 등록이 불가하다.
이를 감안하면 신동빈 회장은 유죄 확정을 받고 나서 사업 전개가 불가한 계열사, 즉 롯데칠성음료와 롯데건설 등에 대해서만 사내이사직을 내려놓은 것으로서 롯데그룹이 주장하는 책임경영과는 거리가 있는 행보로 해석된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 역시 책임경영을 명분으로 주주총회에서 신동빈 회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보인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번에도 해임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초강수를 뒀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이번 주총은 지금까지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유죄를 확정받은 사람이 한일 양국을 아우르는 롯데홀딩스 회장직을 유지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며 “안건이 통과되지 않으면 일본 상법에 따라 제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