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연합뉴스
북한에서 2인자 존재감이 이처럼 높아진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4월부터 김여정을 향한 국내외 언론들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다. 김정은 건강이상설이 불거지자 북한 후계구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김여정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김여정은 이전부터 유력한 후계자로 꼽혀왔다.
그러나 이렇게 이른 시점에 김여정이 북한 정치 전면에 나서 ‘행동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 북한 전문가들도 다소 놀란 눈치다. 한 북한 전문가는 “지금까지 봐온 북한은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면서 “그런데 담화문 발표부터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과정까지 김여정은 명실상부 북한 2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 전문가는 “북한 매체들도 김여정을 2인자로 인정하는 분위기”라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체제 유지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는 2인자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각하고 있다. 굉장한 이상신호”라고 덧붙였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도 “5월 2일 노동신문이 김정은 동정을 보도하면서 건강이상설의 큰 불씨는 꺼졌지만, 여전히 잔불씨는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김여정 존재감이 부각되는 상황 역시 정황 증거”라면서 “여기다 김정은은 외부활동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북한이 2인자를 전면으로 대두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합리적”이라고 덧붙였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표준상.
최근엔 북한 관영매체가 김여정을 연일 ‘당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관심을 모은다. 북한에서 당중앙 호칭은 최고 권력 후계자에게만 붙었던 것이다. 김정일과 김정은 등 북한 최고 지도자들은 권력 중심에 서기 전 북한 언론으로부터 당중앙이라 불리며 후계자 지위를 과시했다. 그런 칭호가 김여정에게 붙은 것이다.
북한의 경제난 역시 김여정의 강경 드라이브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북한 경제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일요신문에 “북한 내에서 장교들 배급이 3분의 1로 줄었다”면서 “하루에 밥을 세 끼 먹다가 한 끼만 먹고 있는 셈”이라고 귀띔했다. 이 소식통은 “평양 주민, 당 고위 관계자들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면서 “코로나19로 시작된 북한의 경제위기 국면에 북한 주민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채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UN 역시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토마스 오헤아 UN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6월 9일 성명을 통해 “코로나19로 1월 21일 북한이 중국과의 국경을 폐쇄하면서 북한의 식량위기가 악화됐다”고 했다. 오헤아 보고관은 “북한 국경지역 무역은 완전히 망가졌고 하루에 두 끼만 먹거나 아예 굶는 가정이 늘고 있다”면서 “군 역시 식량난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북한 경제 상황을 분석했다.
북한 경제위기 시발점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였다. UN 안보리는 2006년부터 14차례에 걸쳐 북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이다. 제재안이 쌓일수록 국제사회에서 거래를 틀 수 없는 북한 블랙리스트 기업 및 개인은 늘어만 갔다. 북한 대외무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제재가 조이면 조일수록 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무역은 뜸해져만 갔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북한 경제를 먹여 살린 건 ‘보따리 무역’이었다. 중국 쪽에서 ‘따이공’이라 불리는 이들이 북중 접경 지역을 드나들며 하는 밀무역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북한은 보따리 무역마저도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6월 16일 북한이 개성공단에 위치한 남북 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은 코로나19가 ‘우한폐렴’이라고 불리던 1월 21일 하늘길을 포함한 모든 국경을 자체적으로 폐쇄했다. 사실상 북한의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시점이었다. 앞서의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북한이 아무런 계획 없이 국경을 폐쇄하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 시점에 북한은 한국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지원은 북한 당국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를 초월하는 지원을 원했던 북한과 국제사회 여론-남북관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미묘한 엇박자를 냈다. 코로나19가 팬데믹(Pandemic·대유행) 상황에 접어든 뒤 한국 정부가 마스크 한 장도 마음먹고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북한은 여기서 상당한 실망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북한 소식통은 5월 31일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가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도 했다. 그는 “북한 당국은 대북 전단 살포를 명분 삼아 그간 한국 정부에 서운했던 내용을 강하게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을 향한 실망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를 통해 피력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김여정이 대남 압박 선봉에 섰다. 김여정은 개성공단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를 주도했다. 2인자의 존재감과 더불어 ‘한다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남북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김여정이 군사행동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경제를 비롯해 내부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한데 가장 좋은 방법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란 주장도 뒤를 잇는다.
2018년 9월 평양정상회담 당시의 사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한 프레임에 담겼다. 사진=연합뉴스
6월 17일 김여정은 “말 폭탄을 터뜨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담화문을 발표했다. 또 다른 북한 전문가는 “김여정과 북한이 원하는 것은 6월 4일과 17일 발표된 담화문에 모두 나와 있다”고 했다. 김여정은 이날 담화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의) 연설대로라면 북남관계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 남조선(한국) 내부의 사정 때문이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지가 따라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과거 그토록 입에 자주 올리던 ‘운전자론’이 무색해지는 변명이 아닐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어 김여정은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어가는 노력도 꾸준히 하겠다고 지루한 사대주의 타령을 한바탕 늘어놓는 순간 변할 수 없는 사대의존의 본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앞서의 북한 전문가는 “이번 담화에서 김여정은 한국 당국의 사대주의를 비판했다”면서 “국제사회 여론을 보면서 대북 사업 전개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는 한국 정부와 문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전문가는 “6월 4일 담화에서 김여정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언급했고, 17일 담화에선 사대주의를 언급했다”면서 “그렇다면 북한이 원하는 것은 뻔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결국 북한은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대북사업을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것을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관광 재개 등 북한 핵심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불만이 쌓였던 것”이라면서 “김여정과 북한이 한국 정부에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북한과 협력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6월 18일 인천 강화군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북한군 초소. 남북 접경 군사지역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의 강력한 압박은 향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6월 18일 북한 관영매체 노동신문은 ‘정세론 해설’을 통해 “한국 정부가 저열하게 사태의 책임만 논하고 있다”면서 “북한군의 자제력은 한계를 넘었으며, 구체적인 군사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는 발표를 신중히 대하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는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연속으로 터져나올 폭음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은 이미 관영매체를 통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지구에 군부대를 재배치할 것을 공언했다. 이와 별개로 국내 안보 전문가들은 북한의 실질적인 군사 도발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안보단체 관계자는 “북한에 위치한 우리 시설물을 북한 당국이 추가로 파손할 우려뿐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 행동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한다면 한다는 것을 보여준 김여정과 북한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을 자행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라면서 “북한 전방 부대에서도 북한 군인들이 경계태세를 격상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연이어 감지되고 있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