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20대 총선 때 장외투쟁을 워낙 오래했던 통합당으로서는 전면전이 부담스럽다. 일단 원내에서 참호를 파놓고 상대의 총알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며 반전의 기회를 찾는, 진지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원 구성을 둘러싼 이번 갈등뿐만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갈수록 거칠어질 대여 전선에서 전면전을 기본으로 할 것이냐, 진지전을 통해 기다리는 싸움을 할 것이냐, 통합당 지도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6월 15일 21대 국회 원구성 법사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가 소집되자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홀로 등원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협치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강한 야당이라면 전면전 불사
통합당은 화가 단단히 났다. 여당이 원구성을 대화로 풀어가는 시늉만 하다 결국 상대를 들러리로 만들어놨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이 6월 15일 법제사법위원회를 포함한 6개 상임위 위원장 선출을 강행하자 “18개 상임위를 다 가져가라”며 국회 보이콧에 들어갔다. 법사위원장을 달라는 요구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다, 상임위원 임의 배정까지 이뤄지자 “도저히 못 참는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며 이종배 정책위의장과 함께 사의까지 표명했다. 주 원내대표는 연락을 끊고 한 사찰로 들어 가버렸다.
6월 15일 통합당 의총에서는 민주당이 상식과 원칙을 깬 만큼 비상하고 중대한 각오를 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나왔다. 최형두 원내대변인은 의총 도중 기자들과 만나 “통합당으로서는 최소한의 자존심과 안전장치가 다 짓밟혔다”며 발끈했다. 의총 직후 가진 규탄대회에서는 ‘이제 대한민국에 국회는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본회의 전 의총에서 장제원 의원이 첫 발언자로 나서 법사위를 내주고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받자는 ‘실리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강경파 목소리에 묻혔다.
통합당은 민주당이 6월 16일 가동한 상임위에도 불참했다. 최형두 원내대변인은 소속 의원들의 상임위 불출석에 대해 “(출석하기) 어렵다. 강제 배정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상임위와 관련해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당 일각에서는 국회 보이콧뿐 아니라 장외투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1대 국회가 시작되는 시점에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순순히 물러나면 4년 내내 거대 여당에 끌려다닐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여당을 직접 맞상대해본 통합당 지도부는 투쟁의 강도나 장소는 조정될지언정, 기본적으로 전면전이 맞다는 입장이다. 현 여당의 태도는 처음부터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었기 때문에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통합당 지도부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듣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협상 상대가 하는 말을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정부·여당이 무언가 정해놓으면 이에 무조건 동참하고 화답해줘야 하는 것이 야당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그림을 협치로 본다는 것이다.
통합당 관계자들은 5월 2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태년 주호영 원내대표 초청 오찬에 대해서도 “결정 사항은 이미 다 정해놓고 그냥 자리를 만들어놓은 것 아닌가. 결국 상대를 들러리로 생각하는 것이고 협치했다는 증표만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는 합의도출이 안되기에 강한 압박투쟁을 통해 여당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게 전면전 필요론의 근거로 보인다.
법조인 출신 한 현역 의원은 “법사위는 야당이 맡는 관행이 있었고, 민주당이 야당 시절 이를 강하게 주장했던 여러 사례가 동영상으로까지 생생하게 존재하는데도 여당이 무리하게 법사위원장을 가져가려 하는 것은 특정 의도가 있다”며 “임기말 레임덕 등에 대비하기 위해 법원과 검찰을 장악하려는 의도인데 이를 국민들이 다 안다. 통합당이 더욱 강하게 치고 나가야 할 명분이 된다”고 주장했다.
#부담스러운 전면전, 여의도연구원 통한 진지전으로?
통합당 내부에서 ‘강한 야당’을 보여줘야 한다는 견해가 비등하지만, 부담감도 뚜렷하게 읽힌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수차례 장외투쟁을 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한 탓이다. 통합당은 국회 및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당과 전면전을 벌였지만 4·15 총선에서 참패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통합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6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미래통합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물을 마시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이 초선 의원 말처럼 전반적 여론 동향도 전면전 불사를 외치는 통합당에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민주당이 통합당 참여 없이 국회 상임위원장 6명을 선출한 것과 관련해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는 국민이 절반을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리얼미터가 6월 16일 진행한 조사(오마이뉴스 의뢰로 전국 18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포인트)에서 응답자 52.4%는 국회법 준수 등을 위해 ‘잘한 일’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37.5%는 합의 관행을 무시하고 여당의 견제 수단을 박탈해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잘 모른다는 응답도 10.1%나 됐지만 ‘잘못한 행동’이라는 답은 예상외로 높지 않았다(자세한 사항은 리얼미터 홈페이지 참고).
일단 참호를 파놓고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 ‘진지전’이 유리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여의도연구원을 과거 전성기 때처럼 반드시 재건하겠다는 의사를 내놓았다. 이에 따라 여의도연구원을 잘 활용해 제대로 된 여론 수렴 정치를 보이고 실력을 발휘한다면, 민주당이 조금만 약점을 보일 경우 총공세에 나서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김종인 비대위 체제는 빅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AI(인공지능) 전문가를 영입, 여의도연구원을 이끌어가게 할 방침이다. 싱크탱크 기능을 살려 과학적 정당, 선거전문가 정당으로 거듭나야만 국민의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게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이를 통해 내년 재·보궐 선거, 여세를 몰아 2022년 대선에서도 승전고를 울린다는 계산이다.
이와 관련,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5월 21일 통합당 당선자 워크숍에서 “민주당의 민주연구원과 여의도연구원의 전략은 비교가 안 된다”고 호된 비판을 가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5월 15일 미래통합당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통합당에 대해 ‘뇌가 없는 정당’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통합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 제 기능을 잃은 걸 보면서 당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여의도연구원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지난 총선에서 실력 발휘한 민주연구원의 역량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4·15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들은 민주연구원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란 경우가 많았다. 자신도 잘 모르는 동네 사정을 민주연구원이 속속들이 파악해 코치해줬기 때문이다.
민주연구원의 양정철 당시 원장은 이동통신사와 독점계약을 맺고 가입자 빅데이터를 입수, 정책을 짜고 시간대별 선거유세일정까지 맞춤으로 만들었다. 현수막 거는 위치나, 골목길 인사 시간까지도 계산해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에 집중 유세를 했다. 역대 최다 의석수 확보를 이끈 1등 공신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다.
이에 김 위원장은 여의도연구원 원장에 AI 전문가인 이경전 경희대 교수를 점찍었다. 이 교수는 국제인공지능학회(AAAI)에서 ‘혁신적 인공지능 응용상’ 등을 세 차례 수상했다. 하지만 이 교수가 차명진 전 의원의 ‘세월호 막말’을 옹호하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통합당은 하루 만에 임명을 철회했다. 김 위원장은 이 교수 말고 다른 빅데이터 전문가를 찾고 있다.
원외위원장을 지낸 한 통합당 인사는 “황교안 대표 체제하에서 벌인 지난해 아스팔트 투쟁을 기억해보라. 통합당은 전면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줬다”며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유권자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당 지도부 생각대로 따라한 결과였다. 여론동향을 따라 가야 한다. 여론조사 못 믿는다고 했다가 큰코 다쳤다. 어차피 선거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못한 결과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론을 잘 분석하며 진지전을 인내 있게 펼치면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