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법원 출석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내에서 처음으로 김정은을 상대로 한 민사재판이 1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558호에서 열렸다. 2016년 10월 11일 처음 소장을 접수한 이후 3년 만이다. 김정은을 피고인으로 세운 이는 탈북 국군포로 노사홍 씨(91)와 한재복 씨(86)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잡혀 50년 가까이 북한에 억류됐다. 33개월간은 북한 탄광에서 강제노역에도 시달렸다. 50년의 세월을 북한에서 살다 2000년이 되어서야 국내로 돌아왔다.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들도 김정은을 피고석에 불러 낼 계획이다. 피해자 가족 법률대리인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은 6월 19일 “북한이 납북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정보 제공을 거절해 가족들이 진실을 알 권리와 가족권을 침해당했다”며 25일 정식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6·25 전쟁 70주년을 앞두고 피해자들이 연달아 북한 지도자를 재판장으로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피고인이 북한에 있다는 점이다. 민사소송법상 소장이 접수되면 특별한 형식적 하자가 없는 한 그 부본을 즉시 상대방에게 송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법원이 김정은에게 소장을 전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은에 대한 소송 소식이 알려지자 일각에서는 ‘북한까지 소장 전달은 누가, 어떻게 하나?’ ‘외무성까지 등기우편이 가능한가?’ 등의 궁금증이 나오기도 했다.
23일 법원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에 가지 않고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원칙적으로는 원고가 소장을 제출하면 즉시 피고에게 소장을 송달하고 30일 이내 답변서를 제출하도록 되어있으나 이 단계에서 송달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원고는 주소보정명령을 통해 ‘공시송달’로 사건을 처리할 수도 있다. 송달이 불가능한 상황에는 ‘수취인부재’ ‘폐문부재’ ‘수취인불명’ ‘주소불명’ ‘이사불명’ 등이 있다.
송달불능을 이유로 원고가 공시송달을 신청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 소장은 법원사무관이 일정 기간 보관한다. 그동안 원고와 피고, 공시송달 사유 등이 기재된 게시글이 법원게시판에 올라간다. 소장 대신이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나면 법원은 다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피고가 해외에 있을 경우 최대 두 달까지 기다린다.
앞으로 있을 김정은에 대한 납북 피해자 가족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공시송달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사유는 ’주소불명‘으로 인한 송달불능이다. 즉, 김정은의 서류 수신 여부와는 상관없이 게시 두 달 뒤에는 소송이 진행된다. 먼저 소송을 진행한 국군포로 변호인단도 올 3월 공시송달을 신청한 이후 지난 3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소송에 속도를 붙였다. 이들은 7월 7일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공판 이후 북한 측에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을까. 이에 대해 민사 소송 법률전문가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봤다. 과거 미국이 두 차례 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판결문을 북한 측에 전달했으나 북한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미국 법원은 2015년 김동식 목사, 2019년에는 오토 웜비어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묻는 판결문을 북한 외무성에 보냈으나 북한은 매번 이를 반송한 바 있다. 적은 확률로 북한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이것이 항소 등의 법적인 형태가 아닌 이상 판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강제노역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탈북 국군포로(왼쪽)와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관계자가 변론준비기일이 열리는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만약 법원에서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면 배상금은 어떤 방법으로 받아내게 될까. 국군포로 변호인단과 납북 피해자 가족 변호인단 모두 ‘웜비어식‘ 배상청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5년 북한에 억류된 뒤 숨진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해 한화 566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웜비어의 부모는 미국 내 북한 자산을 압류하는 방식으로 배상금을 징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이번에도 이와 유사하게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현재 손쉽게 추적 가능한 국내 북한 재산은 영상 저작권료다. 조선중앙TV 등 북한의 저작물을 사용할 때마다 국내 방송사 등에서 저작권료를 지불해왔다. 통일부 산하 법인재단에서 북한을 대신해 저작권료를 걷어왔는데 변호인단에 따르면 이렇게 모인 돈은 약 20억 원으로 현재 법원에 공탁되어 있다. 이번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다면 이 돈의 일부를 배상금으로 받겠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계획이다.
다만 1월 21일 열린 국군포로들의 손해배상 재판 소송가액은 총 4200만 원으로 처음 주장한 배상금 1억 6800만 원에 비하면 줄어든 금액이다. 이에 대해 국군포로 변호인단의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은 23일 일요신문과의 전화에서 “처음 배상금을 책정했을 때는 강제노역에 대한 미지급임금과 육체적‧정신적 피해까지 합했으나 현재는 정신적 피해 보상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질적 배상보다는 국군포로들의 명예 회복을 우선에 둔 결정이었다.
김 변호사는 그러면서 “소송 자료로는 국군포로들의 진술, 가족들의 진술, 동료 군인들의 진술 등을 준비했다. 재판이 3년 동안 미뤄진 만큼 객관적인 기록이 필요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2019년 국방부와 국정원에 사실조회를 부탁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국군포로 후손들은 22일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유엔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에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와 민간인 납북자의 생사 및 행방 공개 등을 조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1953년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추정한 국군실종자는 8만 2000여 명으로 이 중 실제 송환자는 8343명에 불과하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