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 알짜 계열사들이 급매물로 나오면서 M&A 시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내 최대 사모투자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는 최근 65억 달러(약 8조 원) 규모의 펀드 조성에 성공했다. 투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자금을 모으는 블라인드 펀드로,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펀드 가운데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코로나19 사태와 세계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도 6개월 만에 조성을 마무리했다. 국민연금, 행정공제회, 사학연금 등 국내 기관들뿐만 아니라 글로벌 LP(기관 출자자) 50곳 이상이 참여했다.
다른 사모펀드 10곳은 국민연금의 출자금 8000억 원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국민연금은 사모펀드 출자계획을 내놓고 위탁운용사를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최종 5곳을 선정할 방침인데, 국내 1세대 사모펀드 JKL파트너스와 지난해 해양도시가스와 SKC코오롱PI 등 인수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관심을 끌었던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 등 시장에 이름이 알려졌거나 기타 기관출자자 위탁운용사에 선정된 사모펀드 대부분이 참여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국민연금 출자자 선정 전후로 수천억 원 규모의 블라인드 펀드를 조성 중이거나 앞으로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민연금은 펀드 조성의 든든한 우군이다. 그 밖에 중소형 사모펀드 운용사들도 1000억~2000억 원 안팎의 블라인드 펀드를 만들면서 실탄 확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사모펀드, 대기업 M&A 작업 기지개
올해 초까지만 해도 사모펀드들이 국내 M&A 시장을 이끌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지난해 1조 4000억 원에 달한 롯데카드를 비롯해 SKC코오롱PI, LG CNS 지분 등 대형 거래를 쓸어간 데다가, 오렌지라이프, 코웨이 등을 되팔며 엑시트(자금회수) 부문에서도 성공했다. 사모펀드들이 투자, 회수, 펀딩 전 부문에서 선전하자 자금도 빠르게 모였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투자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올해 ‘빅딜’을 목표로 지난해 말까지 조성된 5000억 원 이상의 대형펀드는 약 13개다. 자금 규모만 총 18조 원이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사모펀드들은 두둑한 실탄을 두고서도 방아쇠는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시장이 얼어붙고 금융시장까지 요동치면서 상반기 ‘빅딜’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일부 사모펀드들이 미리 세워둔 일정과 전략 등을 일부 수정하고 중소형 M&A로 고개를 돌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장 상황을 관망하는 데 그쳤다.
투자은행업계에선 지난해부터 묶여있거나 최근 모인 사모펀드들의 자금이 기업 M&A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일찌감치 시장에 나왔던 매물들이 일제히 가치가 하락하면서, ‘잔인한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지분을 인수해 일정 기간 보유 후 되팔아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들 입장에선 ‘알짜지만 제 가격을 못 받고 있는 매물’들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투자은행업계 관계자는 “현재로선 공격적인 투자가 되겠지만 일단 인수에 성공한 뒤 크게 무리하지 않고 이 시기만 넘길 수 있도록 관리만 잘 해둬도 향후 적지 않은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대기업들이 올해 상반기 끌어 모아둔 자금들에도 시선이 모인다. 올해 상반기 주요 그룹들은 일제히 대출과 회사채 발행, 비핵심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현금을 확보했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위기 상황에서 유동성을 확보해 놓기 위한 게 첫 번째 이유지만, 경쟁 또는 사업 관련 업계 구조조정과 M&A에 대비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들 사이에선 괜찮은 수익이 나오는 사업인데도 향후 추진할 핵심 사업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시장에 내놓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이 매물들을 통해 점유율을 높이거나 신사업 추진을 검토하는 곳들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과 LG그룹, 롯데그룹 곳간에 쌓여있는 자금의 향방도 올해 하반기 관심사다. 100조 원의 현금을 보유한 삼성은 전장업체 하만 인수 이후 지금까지 빅딜이 없다. LG는 최근 수년 사이 비핵심 자산을 잇달아 매각하면서 대규모 자금을 확보했다. 롯데는 롯데케미칼을 중심으로 대규모 M&A를 검토 중이다.
대한항공은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부동산과 기내식사업부 등 매각을 검토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알짜, 급매물 쏟아져 나와
M&A 시장 분위기는 점차 달궈지고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충분히 관심을 받을 만한 매물들이 ‘급매’로 쏟아지고 있어서다. 두산그룹, 대한항공이 대표적이다. 채권단의 지원을 받게 된 두산그룹은 두산솔루스를 비롯한 알짜 계열사와 자산을 시장에 내놨다. 대한항공도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부동산과 기내식사업부 등 매각을 검토 중이다. 모두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매각 작업이 시작된다.
이미 반응이 뜨거운 분야도 있다. 환경-폐기물처리업체 3곳이 잇따라 M&A 시장에 나왔는데, 인수 경쟁이 치열했다. 폐기물은 경기 변동과 관계없이 꾸준히 늘어날 수밖에 없고, 시설 증설도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경기를 타지 않을 업종’으로 통한다. 이 같은 시장 평가가 반영돼 업계 1위 코엔텍은 최근 5100억 원에 IS동서-E&F프라이빗에쿼티(PE)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비슷한 시기 외국계 사모펀드 KKR은 국내 의료폐기물 업체 ESG를 8000억 원에 인수했다. 현재 종합환경플랫폼 업체 EMC홀딩스도 매각이 추진 중인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몸값이 1조 원대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 밖에 현대HCN, CMB, 딜라이브 등 국내 케이블TV 업체들이 연달아 매물로 나왔고, 미스터피자를 운영하는 MP그룹, 아웃백스테이크 한국법인과 할리스커피 등 식음료 업체도 새 주인을 찾고 있다. 꾸준히 계열사나 사업부 매각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CJ와 신세계 등 주요 그룹 계열사들의 움직임도 관심을 끌고 있다. 비주력 사업 매물이 나올 가능성이 거론된다.
다만 이 같은 분위기가 일부 업종의 일시적 현상으로 그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코로나19 여파로 경기는 침체됐고 금리는 하락했다. 원매자 입장에서는 매물이 저평가됐지만 효율성이 떨어지고, 매도자 입장에선 실적 개선이나 ‘몸만들기’ 등 기업가치를 높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매수자는 현재 가치를 반영해 거래를 원할 수밖에 없고 매도자는 그 반대를 요구해야만 한다. 결국 양쪽이 만족할 만한 협상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셈이다. 투자은행업계 다른 관계자는 “상반기와는 M&A 시장 분위기가 분명 다르겠지만 사모펀드들도 공격적인 투자에는 한계가 있고, 매도자들 입장에선 기업가치가 개선돼야 매물로 내놓을 수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급매물’이 아닌 이상 매수자와 매도자의 눈높이 격차가 좁혀지는 건 쉽지 않을 것”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