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벌어진 방’이 전 세계 외교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책이 나오기까지 진통은 심했다. 애초 3월 17일 출간 예정이었지만 백악관은 400여 곳에 대한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고 볼턴은 거부했다. 백악관은 국가기밀과 안보 문제를 제기하며 출간을 계속 막으려 했다. 6월 16일엔 볼턴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뒤 ‘누군가’가 책을 PDF 파일 형태로 외부에 빼돌렸다. 이 PDF 파일은 전 세계로 퍼졌다.
볼턴은 자신의 회고록을 15개 챕터로 나눠 쓴 뒤 마지막 챕터에서 자신이 2014년 4월 14일 이미 냈던 비평 ‘가장 관료주의적인 사람(The most bureaucratic of bureaucrats)’을 인용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이 비평은 로버트 게이츠가 2014년 1월 14일 펴낸 회고록 ‘임무: 장관의 전쟁 회고록(Duty: Memoirs of a Secretary at War)’을 볼턴이 읽고 쓴 글이었다.
“게이츠가 백악관 내부 이야기를 폭로해 배신자라 불리겠지만 나는 은퇴한 공직자가 자신이 정부에 속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정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문기사나 급조된 이야기는 통찰력이 부족하고 정부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얕기 때문이다.”
로버트 게이츠는 2014년 회고록을 펴냈을 때 숱한 논란을 남겼다. 게이츠는 부시 대통령에 이어 오바마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계속 국방부 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당파성을 뛰어넘는 실용적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게이츠는 오바마 행정부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주요 현안을 세세히 공개하는 걸 넘어 오바마 대통령 등 당시 미국 지도부에 대한 혹평을 쏟아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반미적(anti-American)이고 정신 나간(crazy) 인물이라 평가해서 국내에서도 논란이 됐다.
이 비평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이 백악관을 떠난 뒤 이와 같은 회고록을 쓸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 듯하다. 볼턴이 “게이츠가 회고록을 낸 시점을 두고 쏟아진 비판은 적절하지 않았다. 기억이 신선할 때 나오는 것만큼 좋은 순간은 없다. 재임자나 전임자에겐 불편할 수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작가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게이츠의 폭로가 대통령이든 행정부 수반에 대한 신뢰를 건드렸든 더 중요한 건 대통령이 진심을 다한 보좌진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건 작게 볼 일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비평을 적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당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사진=청와대 제공
볼턴은 회고록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유출자 처벌을 하는 것보단 귀를 열고 주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라고 썼다. 그러면서 건국 이래 폭로로 중심을 잡아온 미국의 역사를 인용했다.
“대통령의 행보는 정당성을 갖지만 그게 반드시 정확하단 말은 아니다. 세상의 눈은 대통령의 행보를 늘 주시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건국된 이래 행정부 안 누군가는 내부의 갈등을 늘 유출해 왔다. 미국 건국 때 건국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정파적 언론에 기대 자신만의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때부터 말이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정부 운영 방향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행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말보다는 글로 논쟁했다. 볼턴은 이와 같은 근본적인 폭로 문화가 미국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걸 암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볼턴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문장으로 책을 마쳤다.
“대통령의 진정한 역할은 입법부와 사법부를 뚫고 나아가는 일이다. 그건 보통의 사람이 흔히 가진 자신감 같은 걸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미국 정치계에서 활동하는 ‘어른’이라면 내가 쓴 책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걸 이해할 것이다. 정치에선 ‘비밀을 지켜야 하는 룰(Rule of omertà)’ 따윈 없다. 시카고 정도는 제외하고 말이다. 난 이 말을 아직 존중한다.”
시카고를 두고는 몇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시카고는 전통적으로 마피아의 고장이다. 마피아에게 비밀 누설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하나는 시카고 경찰의 ‘침묵 명령(Code of Silence)’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 명령은 동료 관료의 나쁜 행동을 못 본 체하는 경향의 시카고 관료 문화를 뜻한다.
다른 하나는 오바마 전 대통령을 소환한다. 시카고는 오바마의 고향이다. 오바마 재임 시절이었던 2013년 6월 10일 미국 국가안보국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이 우호국 정보기관과 힘을 합쳐 전세계의 일반인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정보 등 개인정보를 비밀정보수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수집 및 사찰해 온 사실을 폭로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스노든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스노든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정부가 날 감옥에 보내거나 죽인다 해도 이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다가오는 진실을 막을 방법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 최측근으로 미국의 행정 전반을 책임지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은 볼턴의 책을 두고 ‘반쪽짜리 진실’이라고 했다. 이 책은 볼턴이 겪은 일과 자신의 생각을 반반씩 섞어 작성된 회고록이다. 넌지시 진실에 가깝다는 말을 하려던 것으로 풀이된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