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문을 연 건 현대산업개발이다. 지난 6월 9일 입장문을 내고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관련기사 저울질만 하다 놓을 수도…HDC현산 ‘아시아나 줄다리기’의 맥). 앞서 산은이 “거래 완료시점까지 인수 의사를 밝혀야 계약 연장이 가능하다”고 최후통첩을 보낸 것에 대한 회신 성격이었지만 사실상 협상의 ‘판’을 완전히 뒤집는 제안이었다.
현산이 낸 입장문의 첫 문장은 “인수 의지에 변함이 없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지난해 말 인수계약 체결 당시와 비교해 지금의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가치가 크게 떨어진 만큼 인수 조건을 다시 정해야 한다는 게 현산의 시각이다. 항공업이 코로나19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만큼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현산이 내세운 인수 조건 재검토 근거를 뜯어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입장문의 제목을 ‘인수 포기 사유’로 바꿔도 무리가 없을 만큼 계약 조건 변경이 불가피한 사유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나열했다. 산은 등 채권단에 대한 요구도 다소 추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현산은 “아시아나항공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원책과 계약 체결 당시의 본원 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전제로 계속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현산이 향후 재검토 협상을 ‘서면’으로만 하겠다고 밝힌 점도 이목을 끌었다. 언론의 관심도가 높은 민감한 사안이라, 서면을 통해 의견을 나누면서 혼선을 막고 논란의 여지를 최소화하자는 것이 현산의 입장이다. 투자은행 업계에선 ‘빅딜’의 세부 조건을 조율하는데 서면으로 진행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서면 협상’ 제안 역시 인수 포기에 무게를 실은 결과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본사. 사진=이종현 기자
#산은의 반격...공은 다시 현산으로
산은도 현산과 비슷한 방식으로 응수했다. 보도자료 형식으로 답변을 했는데 내용에는 ‘날’이 서있었다. 재협상 의사를 밝혔고, 협상 상대방이 먼저 제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앞서 산은은 현산의 입장문이 나온 다음날 곧바로 인수 조건 재검토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1쪽짜리 자료를 내놨었다. ‘진짜 입장’은 지난 6월 17일 열린 이동걸 회장의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나왔다. 이 회장은 “(현산이) 서면 협의를 말했는데 60년대도 아니고 무슨 편지를 하느냐”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간담회 종료 직후에는 ‘HDC현산 보도자료 참고 자료’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현산의 주장 가운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며 사실상 ‘팩트체크’에 나선 것이다. 산은은 현산이 입장문에서 재검토 사유로 내세운 4조 5000억 원 부채증가와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한 부정적 의견, 현산 동의 없이 이뤄졌다고 주장한 채권단의 1조 7000억 원 추가 지원 등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산은은 아시아나항공의 부채가 4조 5000억 원 증가한 것에 대해 “리스부채 및 정비충당부채 관련 회계기준 변경이 주된 원인이며, 금액은 다소 과대하게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현산 입장에선 빚이 되는 ‘1조 7000억 원 차입’은 사전에 충분히 설명했고, 현산 측이 부동의해 동의 없이 진행했다며 사실상 책임은 현산에 있다고 했다.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과 완전히 다른 의미라 신뢰성과는 관계 없다고 선을 그었다.
투자은행 업계에선 양측의 공방을 주도권 다툼으로 해석하고 있다. 보도자료를 활용해 언론을 통한 여론전을 펼친 것도 협상이 재개될 경우 우위를 쉽게 내주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현산의 ‘서면 협상’과 산은의 ‘만나서 얘기하자’는 취지의 갈등은 계약 무산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서면으로 진행한 협상 내용은 계약 파기 이후 현산이 계약금을 환수하기 위한 소송에서 증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앞서 한화는 2009년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무산된 후 9년간의 법정 소송 끝에 산업은행으로부터 계약금 3150억 원 중 1951억 원을 돌려받았다. 이번에 현산이 낸 계약금은 2500억 원이다. 한 M&A(인수·합병) 전문 변호사는 “현산은 입장문을 통해 인수 포기 가능성을 암시했고, 산은은 반박 자료에 포기 명분을 최소화하는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조건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제시하라는 입장”이라며 “재협상을 둘러싼 양측의 수싸움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점. 사진=연합뉴스
#협상 장기화 전망
산은과 현산의 재협상 일정은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산은은 이동걸 회장의 간담회 이후 현산에 별도로 재질의 공문을 보냈다. 다시 현산으로 공이 넘어간 셈이다. 산은이 우회적인 비판과 ‘팩트체크’로 공개 자극을 한 탓에 현산도 답변을 무작정 미룰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서로 공방을 한 차례씩 주고받으면서 상대 의중을 일부 파악한 만큼 이번 공문-답변으로 의견 조율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현재 협상과는 별개로 현산과 산은은 문서를 주고받으며 소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재협상에 대해 공감대를 이룬 만큼 6월 27일로 정해져 있던 거래 종결 기한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협상은 현산과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한 러시아의 해외기업결합심사가 마무리되는 시점부터 시작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기업결합 심사 대상 6개국 중 러시아는 마지막 절차다. 앞서 현산과 산은은 기업결합심사 등 다양한 선결 조건에 따라 계약을 마무리 짓거나 연장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러시아 심사 결과는 늦어도 7월 전에는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핑퐁게임에 접어든 만큼 재협상이 시작돼도 과정은 매끄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산은 인수 대금 인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산은은 충분히 공감하더라도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가 불거질 수 있어 섣불리 낮춰줄 순 없는 상황이다. 최근 산은과 채권단은 최근 아시아나항공 매각 회계자문을 맡고 있는 EY한영의 보고서를 참고하고 자본 확충을 지원하기로 했다.
EY한영은 보고서에 “채권단이 5000억 원의 자본 확충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채권단이 아시아나에 지원하기로 한 1조 7000억 원의 추가 자금에는 영구채 인수가 포함된다. 영구채 인수로 채권단의 아시아나 지분율이 높아지면 현산과 채권단 모두에게 부담이 된다. 채권단 지분이 높을수록 현산이 추후 아시아나항공을 경영할 때 채권단의 입김을 감당해야 한다.
한편 현산은 최근 별도로 2000억 원 규모의 채권 발행에 나섰다. 현산의 현금성 자산이 1조 9000억 원에 달하고 차입보다 현금이 더 많은 만큼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한 자금 조달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만 현산 측은 “기존 회사채 상환을 위한 단순 채권 발행”이라고 선을 그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