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A White House Memoir)’ 표지.
회고록은 총 15장으로 나뉘었다. 볼턴은 한국과 북한, 일본과 트럼프, 볼턴 사이의 첨예한 대립 관계에 따른 각 이해관계자 발언과 행동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볼턴의 눈에 한국은 통일에만 집중하며 북미 사이의 ‘에이전트’가 되려는 모습으로 비쳤다. 트럼프는 비용 절감과 자신의 치적 홍보 외엔 국제 정세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베 일본 총리와 볼턴은 한 편이 돼 대북 협상 고지에서 우위에 서려고 노력했다. 둘의 목적은 위협 제거였다. 김정은은 ‘에이전트’ 역할을 하려는 한국의 속내를 파악하고, 오직 미국과의 직통 라인에만 관심을 뒀다는 게 볼턴의 주장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볼턴은 북한 위협을 제거하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가 박자를 맞춰주길 기대했다. 일본 측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의지가 변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가 나와야 지원이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또 미사일과 생화학무기를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때마다 이를 거듭 제기했다.
이런 판에서 김정은의 목표는 대미 직통 라인 구축이었다. ‘연결고리’에 의해 수없이 좌지우지된 선대 정권의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고 알려졌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문재인 대통령 참여를 막는가 하면, 친서를 보내 트럼프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전 미 정부의 적대 정책을 비난하며 “북미 정상이 자주 만나면 비핵화에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다. 볼턴은 이런 김정은의 친서를 ‘연애편지’라고 표현하며 강경하게 대할 것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거듭 촉구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향한 이미지 구축에 더 큰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건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핵심 내용이 빠진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승리를 선포하고 이곳을 빨리 뜰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땐 “만약 대북제재 해제안을 내가 받아들이면 정치적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며 “난 대선에 패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2019년 6월 판문점 회동 전에도 북한은 “이건 북미회담이다. 남한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당일 만남 때도 거부했었다. 그러나 막판 문 대통령이 참여했고, 남북미 정상이 함께하는 역사적 장면이 완성됐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이해관계를 맞춰가는 사이 문재인 대통령은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얻은 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게 볼턴의 시각이었다. 2018년 5월 22일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 함께하길 원했고, 하루 전인 6월 11일까지도 오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표명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2019년 6월 판문점 회동 전에도 북한은 “이건 북미회담이다. 남한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당일 만남 때도 거부했었다. 그러나 막판 문 대통령이 참여했고, 남북미 정상들이 함께하는 역사적 장면이 완성됐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과 핫라인 전화기를 개설했지만 전화기는 노동당 본부에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핫라인 전화기에 간 적이 없었다. 전화기는 게다가 주말에는 작동하지 않는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을 잘 구슬리며 구두로 사안을 합의한 뒤 추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식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습성을 보였다. 거래를 하기로 한 뒤 할인을 요구하는 모습과 유사했다. 어떠한 합의가 오간 뒤 한미연합훈련 ‘맥스 선더’를 문제 삼으며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고 하거나 북한을 찾은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주지 않은 뒤 화가 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곧 만나자”고 제의를 보내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볼턴은 이런 김정은을 마냥 받아주는 트럼프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사이만 돈독하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볼턴은 형식적인 평화보단 실질적인 비핵화가 평화를 담보한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오로지 비핵화와 위협 제거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즈니스맨 출신답게 안보 관련 비용을 무조건 금전으로만 계산했다. 미국은 동맹국과의 방위비 분담 산출 공식을 별도로 정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주둔 미군에 들어간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꺼냈다.
볼턴은 구두 협의만 이뤄지고 실제 행동이 없었던 남북정상회담을 가리켜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가 날아다녔지만 실체가 없었던 축제’에 불과하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반대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9월 볼턴을 해고했다. 그런 뒤 볼턴은 회고록을 출간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