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 사진=임준선 기자
한 정치권 인사는 얼마 전 상갓집에서 윤석열 총장을 만났다. 여권 인사들이 윤 총장을 향한 공격의 수위를 점차 높여가던 무렵이었다. 이 정치권 인사가 ‘기운 내시라’고 하자 윤 총장은 ‘뭐 별 일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치권 인사는 “최근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살도 좀 빠진 듯했다”면서 “가까운 지인들이 윤 총장에게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이후 대립각을 세웠던 윤 총장과 여권의 관계는 검찰-언론 유착 논란, 한명숙 전 총리 사건 감찰 문제 등을 놓고 더욱 악화됐다. 윤 총장 상관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급 인사들이 잇달아 윤 총장을 향해 날선 발언을 쏟아냈다.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은 “나라면 그만둘 것”이라며 윤 총장 사퇴론을 꺼내기도 했다. 여권에선 더 이상 윤 총장이 직을 수행하기가 어려운 것 아니냐는 공감대가 폭넓게 퍼져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관련기사 너도나도 ‘검찰 수사 못 믿겠다’…공수처 앞두고 흔들리는 윤석열호).
공룡 여당은 법사위에 윤 총장을 불러 ‘한명숙 사건’ 등 여러 현안들에 대해 추궁한다는 계획이다. 또 7월 출범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역시 윤 총장을 견제할 것으로 점쳐진다. 윤 총장의 ‘버티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내부 여건 역시 녹록하지 않다. 현재 서초동에선 ‘검찰총장은 윤석열과 이성윤(서울중앙지검장) 두 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윤 총장이 법무부와 서울중앙지검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란 말도 나돈다. 현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이성윤 지검장에게 그만큼 힘이 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측근들의 지방 발령으로 팔다리가 잘린 윤 총장으로선 내우외환에 빠져 있는 셈이다.
여권에서 윤 총장 비토 기류가 급격히 퍼진 배경엔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 바로 1조 6000억 원대 피해액이 발생한 이른바 ‘라임 사건’이다. 최근 여의도에선 라임자산운용 ‘전주’이자 핵심 피의자인 김 아무개 회장으로부터 현금과 향응 등을 접대 받은 여권 정치인들이 거론됐다. 여기엔 민주당 전·현직 의원들, 청와대 관계자,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총선 대승 후 잔칫집 분위기였던 여권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김 회장 진술이 흘러나온 진원지로 검찰을 지목했다. 검찰이 수사 내용을 의도적으로 흘렸다고 봤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6월 2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주연구원 주최로 열린 초선의원 혁신포럼 ‘슬기로운 의원생활’에 참석한 모습. 사진=박은숙 기자
여권의 이러한 반응은 역설적으로 검찰 수사가 그만큼 위협적인 것임을 방증한다. 그동안 여권 인사들은 라임 사태와 관련해 김 회장을 비롯한 일부 투기 세력의 개인 일탈이라고 선을 그어왔다. 하지만 검찰은 김 회장 횡령 부분과는 별개로 김 회장의 정·관계 로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당청 정치인들이 수사선상에 올랐고, 이는 정가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 친문재인계 의원은 “피의사실 공표 금지가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행태가 되풀이됐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면서도 “다만, 언론 등을 통해 나오고 있는 혐의점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여권도 상당한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검찰 및 사정당국 등에 따르면 수사팀이 김 회장 정·관계 로비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팩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론된 부분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전언이다. 사정당국 한 고위 인사는 “김 회장이 언급했던 정치인들 사례는 2016년 이전의 일들로 라임과 관련이 없다. 또 지금 와서 불법성을 따지기 어려운 부분들도 많다”면서 “이름이 오르내린 정치인 중 현 정권 실세는 없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짜는 따로 있지만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라는 메시지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 본류는 라임 사태 전후로 이뤄진 김 회장 구명 정황이다. 즉, 김 회장을 비호하려 했던 현 정부 실세들이 최종 타깃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라임 펀드 환매 중단 이후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금융당국과 검찰은 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 등 핵심 피의자들은 잠적하거나 도주했다. 이들은 올해 4월경 체포될 때까지 수배상태였다. 이 기간 수사팀은 몇몇 여권 실세들이 금융당국과 검찰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김 회장 등에게 수사 관련 정보를 준 것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1월 11일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라임 수사에 정통한 한 검찰 관계자는 “김 회장으로부터 압수한 휴대폰 통화 목록, 김 회장을 포함한 피의자 진술 등을 바탕으로 누가 그를 도와줬는지 확인 중”이라면서 “처음 라임 사태 조사에 착수했던 금융당국, 그리고 수사를 배당받았던 검찰 수사진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알아내려 했던 한 사정기관 관계자를 의심하고 있다. 이 관계자가 민주당 고위 인사에게 이를 전했고, 이 내용이 김 회장에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그는 “김 회장도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시인한 상태”라면서 “조만간 금융당국 직원과 검찰 수사관 등을 불러 확인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앞서의 사정당국 고위 인사 역시 “처음 라임 사태가 불거진 후 금융당국 등에 외압을 넣으려 했던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있었다. 김 회장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관계자와의 친분을 털어놨다. 검찰은 친분 그 이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김 회장과 그 관계자 사이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를 종합하면 라임과 김 회장 횡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의 칼날은 당청 실세들을 향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임 사태 ‘불똥’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문재인 정부 심장부까지 튈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최근 윤 총장을 두고 여권에서 나타나고 있는 장면들은 검찰의 이러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궁지에 몰려 있는 윤 총장의 역공에 여권 역시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문계의 한 핵심 의원은 “조국 사태 때도 그랬지만 윤 총장이 검찰 조직 특정 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리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게 여권의 전반적 인식”이라면서 “역대 정권들은 결국 검찰에 백기를 들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다르다. 총선 압승과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검찰개혁을 완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총장 측은 “성역 없는 수사로 말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혔다. 일요신문이 취재를 위해 접촉한 ‘윤석열 사단’ 검사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꼈다. 비장함 속에 위기감이 묻어났다. 배수진을 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윤 총장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윤 총장과 오래 근무를 했던 검찰 출신 변호사는 “윤 총장이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수사를 그만두는 것은 윤 총장 스타일이 아니다”라면서 “압박의 강도가 더 세질수록 윤 총장 역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사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윤 총장 역시 직을 건 마지막 수사라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