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은 얼마 전 정부로부터 고위 간부인 김 아무개 임원과 이 아무개 국장을 중징계에 처하라는 요구를 통보받았다. 이들은 최근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감찰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이 중징계를 요구 받은 것은 2018년 10월 한 시중은행 영업점 직원이 고객의 휴면계좌 비밀번호를 무단 도용한 사건 등을 적발하고도 지금까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금감원 측은 사건 처리를 고의로 지연한 것이 아니라 해외 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등 대형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뒤로 밀린 것뿐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에서는 사건의 경중을 자세히 따져보면 지나친 감이 있다는 반응이 주류다. 고객의 비밀번호를 도용한 것은 분명 중대 범죄지만, 일개 영업점에서 일어난 일이고 휴면계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위 간부가 중징계까지 받을 일인지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징계 대상들의 번지수가 이상하다’는 의혹이 나온다는 점이다. 금감원에서 계좌 비밀번호 관련 업무는 주로 IT, 핀테크국에서 담당한다. 그런데 징계를 받은 간부들은 은행 관련 업무를 주로 맡아 이 부서와는 큰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다.
최근 금감원 안팎에선 “은행에 밉보이면 죽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사진=임준선 기자
금융권에서는 이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배경에 한 은행 최고경영자(CEO)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두 사람은 이 CEO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총대를 멘 인물들이라서다. 특히 ‘강성’으로 알려진 김 임원은 DLF 사태 등 해당 은행 관련 사건에서 내부 비리를 공개하는 등 퇴진 작업의 전면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CEO는 금감원과 법정 소송까지 벌이며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이 때문에 금융권은 이 CEO가 현 정부와의 친분을 활용해 금감원을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일종의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사실 금감원이 민간 금융사로부터 ‘도전’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조짐을 보이더니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대들기’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특히 최고 경영진의 거취가 걸린 ‘CEO 리스크’가 발생하면 전방위적인 압박을 서슴없이 가하고 있다.
‘갑과 을’이라는 금감원과 은행의 관계가 무색해지는 장면이 처음 목격된 것은 2014년 금융권을 뒤흔든 ‘KB 사태’ 직후였다. 당시 KB금융그룹에서 전산기 교체를 둘러싸고 경영진 내분이 발생하면서 고위 임원들이 중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최수현 당시 금감원장은 징계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심지어 중징계가 결정된 사안을 뒤집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 결과로 금융권에 일대 혼란이 발생하자 그는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 그리고 KB금융 사태를 담당했던 고위 간부는 다음해 외부연수를 나가는 방식으로 금감원을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감원이 ‘종이호랑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2018년 은행 채용비리 사건이 발생하면서 추락한 위상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당시 최흥식 금감원장은 금융권 채용 비리 조사를 직접 진두지휘하며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이 다른 채용 비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전격 경질됐다. 한 금융지주 사장 출신인 그는 해당 금융사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채용 과정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최흥식 원장과 한 배를 타고 해당 은행과 갈등을 빚었던 김 아무개 국장도 지방자치단체 파견 형식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금융권에서는 해당 은행에서 손을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을 거두지 않고 있다. 최흥식 원장이 물러나는 과정에서 투서 등이 난무했던 것을 볼 때 의심스런 대목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최 원장이 물러나고 윤석헌 현 금감원장이 새 사령탑에 취임한 뒤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DLF 제재, 키코(KIKO) 보상 등 대형 금융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금융사들은 반기를 들며 금감원 결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다.
금감원은 DLF 불완전 판매를 이유로 두 금융그룹 회장들에게 중징계에 해당하는 문책경고를 내렸다. 하지만 해당 금융그룹 회장들은 행정소송으로 맞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법원도 금융사 손을 들어줬다. 지난 6월 말 서울행정법원은 금융사들이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중징계 행정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무더기로 인용했다. 회장들뿐 아니라 계열사 사장들이 낸 집행정지 신청도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금감원의 징계는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임 초부터 윤석헌 원장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키코 분쟁조정 문제도 금융사에 백기를 들었다. 우리은행을 제외한 모든 금융회사가 보상을 거부하면서 금감원은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금융권을 강타하고 있는 사모펀드 사태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7월 1일 라임자산운용 사태에 대해 100% 전액 배상 결정을 내렸다. 100% 보상은 금감원의 금융투자상품 분쟁조정 사상 처음 있는 결정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추후 법률 검토를 거쳐 수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권은 해당 은행들이 수용 대신 소송을 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돈이 문제뿐만 아니라 ‘CEO 리스크’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금융사들이 금감원 배상안을 따를 경우 물어줘야 하는 돈은 은행별로 300억~650억 원에 달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사실 은행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돈을 물어주면 책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이는 경영진의 ‘배임’으로 연결된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소송에서 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 법정으로 끌고 들어가 시간을 끌 것”이라면서 “정권은 유한하고 회장(CEO) 임기는 무한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