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2019년 1월 ‘스포츠 미투’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것이 시작이었다. 심석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연쇄적 공익제보로 이어졌다. 스포츠계 여러 종목에서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발언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었다. 스포츠 미투에 대한 정치권 관심은 폭등했다. 그러나 엘리트 체육계 병폐를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뿐이었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걸쳐 스포츠계 폭행·성폭력 등 비리와 관련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정치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폭로의 장을 마련해주는 역할밖에 해주지 못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 역시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1년 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스포츠 인권 이슈는 금세 차갑게 식었다. 손혜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둘러싼 목포 부동산 투기 논란을 시작으로 ‘조국 사태’ 등 정치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스포츠 인권 현안은 정치권의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있던 2020년 초 거대 양당은 각 분야별 인재 영입에 돌입했다. 엘리트 스포츠계 고질적 병폐를 폭로한 유력 공익제보자들은 거대 양당 인재 영입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분명 정치권 전반에 걸쳐 “스포츠계 폭행·성폭력이 재발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럼에도 뒤틀린 체육계 시스템을 개조할 만한 인물을 영입하는 ‘실제 행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스포츠계 비리를 폭로한 공익제보자 가운데 거대 양당에 영입된 인물은 김은희 전 테니스 코치가 유일했다. 김 전 코치는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이 영입했다. 김 코치를 제외하고도, 복수 스포츠계 공익제보자가 거대 양당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러브콜이 영입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체육계의 시선은 김 전 코치의 공천 여부에 쏠렸다.
공천 장벽은 높았다. 김은희 전 코치는 자유한국당에 입당한 뒤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 전 코치는 이어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체육계 출신 인사들이 공천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정치권은 다시 한번 ‘성공 신화’를 이룩한 체육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 사진=박은숙 기자
21대 총선에서 거대 양당 공천을 받은 ‘체육계 새 얼굴’은 두 명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2004 아테네올림픽 당시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실화를 녹여낸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을 영입했다. 바로 임오경 전 여자 주니어 핸드볼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임 전 감독은 경기 광명갑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뒤 선거에서 승리하며 여의도에 입성했다.
보수 진영 비례정당 미래한국당은 한국판 쿨러닝을 이끌며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썰매 종목 대약진을 이끈 인물을 택했다. 이용 전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미래한국당은 썰매 불모지였던 한국 봅슬레이·스켈레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높이 평가해 이 전 감독을 비례대표 명단 18번에 배치했다. 21대 총선에서 미래한국당은 비례대표 당선자를 19명 배출했다. 이 전 감독은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이 전 감독이 당선된 뒤 미래한국당은 미래통합당과 합당했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지 한 달 만에 체육계 출신 의원들은 시험대에 섰다.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고 최숙현 선수의 극단적 선택 이슈와 관련해 임오경 의원과 이용 의원은 스포츠계 고질적 병폐와 관련한 이슈를 마주했다. 많은 시선이 두 의원에게 쏠렸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한 스포츠 단체 관계자는 “체육계 전문가로서 엘리트 스포츠계의 고질적 병폐를 지적하는 의원들의 모습을 기대했다”고 밝혔다.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해자 옹호 논란’ 중심에 섰다. 고 최숙현 선수 동료들과 통화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TV조선은 7월 5일 보도를 통해 임 의원이 최 선수 동료와 통화한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임 의원은 “(가해자들 관련) 다른 절차가 충분이 있고, 징계를 줄 수 있고, 제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라고 말했다.
임 의원은 최 선수가 경주시청에서 부산시청으로 팀을 옮긴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과 관련해선 “좋은 팀으로 왔고, 좋게 잘 지내고 있는데 지금 부산(시청) 선생님은 무슨 죄가 있고 부산시체육회가 무슨 죄가 있고”라면서 “왜 부산 쪽까지 이렇게 피해를 보고 있는지”라고 했다. 임 의원은 “지금 폭력 사건이 일어났다고, (엘리트 스포츠) 전체가 맞고 사는 줄 안다”, “경주시청이 독특한 것” 등 발언으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해당 보도와 관련해 임 의원은 입장문을 내 해명했다. 입장문에서 임 의원은 “진상규명이 두려워 이를 끌어내리려는 보수 체육계와 이에 결탁한 보수언론에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월 6일 JTBC는 보도를 통해 임 의원과 취재진의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이 통화에서도 임 의원은 가해자 옹호성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보도에 따르면 임 의원은 취재진과 통화에서 “지금 제일 걱정하는 것은 가해자들”이라면서 “죄 지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려놓고 봐야죠”라고 했다.
스포츠계 비리를 폭로했던 한 체육계 공익제보자는 “임 의원이 스포츠 적폐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공익제보자는 “임 의원의 경우엔 완벽한 엘리트 체육인 출신의 엘리트 마인드를 보여줬다”면서 “피해자 중심 사고가 아닌 가해자 중심 사고를 하니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했다.
그는 “선수 시절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선수들이 지도자 및 협회 관계자 등 ‘관리 조직’으로 들어갔을 때 공감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고 최숙현 선수 현안과 관련해 임 의원이 보여준 행보 역시 앞서 언급한 관리 조직의 사례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7월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의원직을 걸고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강수를 뒀다. 이 의원은 같은 날 최 선수 동료 2명과 함께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동료 선수들은 최 선수가 전 소속팀 감독과 선배 운동선수 등으로부터 가혹행위에 시달렸다고 폭로했다. 이 의원은 최 선수 동료들에게 무대를 마련해줌으로써 엘리트 체육계 병폐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체육계에선 이 의원 행보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한 엘리트 체육인은 “예전에도 이런 사태가 터지면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기자회견을 마련해줬다”면서 “‘공익제보 릴레이’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엘리트 체육계에 만연한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이 체육인은 “스포츠계는 남의 집 숟가락 숫자도 알 만큼 좁다”면서 “제대로 된 시스템이 정착하지 않으면 이번에 용기를 낸 공익제보자들도 머지않아 소외받는 입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윤희 문체부 차관. 사진=박은숙 기자
또 다른 체육인권단체 관계자는 “7월 6일 열린 문체위 회의를 보면 정치권이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엘리트 체육계 병폐와 관련해 일체 관심이 없었고, 공부도 제대로 안 돼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체위에서도 보여주기식 문책밖에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엘리트 체육인 출신인 임오경 의원, 이용 의원, 최윤희 문체부 차관 모두 2019년 초 ‘스포츠 미투’가 핫이슈로 떠올랐을 당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서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지만,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와 관련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해도 특별한 기대를 갖기 어려운 것이 체육인들의 입장”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편 21대 총선에서 공천 장벽을 넘지 못했던 ‘체육계 공익제보자’ 김은희 전 테니스 코치는 7월 8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엘리트 체육계 병폐와 관련된 문제는 ‘체육 전문가’와 ‘체육 비전문가’가 뚜렷한 차이를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김 코치는 “아무리 체육 전문가여도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접근 방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전 코치는 “근본적인 문제는 시스템”이라면서 “비인기 종목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터지면 ‘팀 해체’를 언급하는 강수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입을 막으려는 관리자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다. 그는 “소속팀은 선수들의 밥줄인데, 그 밥줄이 관리자들의 협상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면서 “용기를 내어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 엘리트 체육계의 여전한 현실”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