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의 장남 김남호 DB금융연구소 부사장이 그룹 회장에 오르면서 2세 경영이 본격화됐다. 사진=DB그룹 홈페이지 캡처
DB그룹은 지난 1일 이근영 회장이 물러나고 김남호 부사장을 신임 회장에 선임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2000년대 초부터 그룹 지분을 승계해 DB손해보험과 DB Inc 지분 9.01%와 16.83%를 각각 보유한 최대주주로, 회장직에 오르면서 그룹을 총괄한다. DB손해보험은 DB생명·금융투자·캐피탈 등 금융계열사를, DB Inc는 DB하이텍·메탈 등 제조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김남호 회장은 2009년 DB그룹에 입사해 동부제철·팜한농에서 실무를 익혔고, 2015년부터 DB금융연구소로 옮겨 금융업 위주 그룹 개편에 힘썼다. 그러나 뚜렷한 실적은 없다는 평가가 적지 않은데, 그룹이 오랜 기간 재정난과 오너리스크로 휘청거린 탓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준기 전 회장은 1969년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인수하며 그룹을 창업했다. 이후 1970년대 초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해 큰 이익을 남기면서 물류·금융·전자·제철·농업 등 다양한 투자로 계열사를 늘려 2000년 재계 10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구조조정을 겪으며 주요 계열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DB그룹 ‘위기 탈출 20여 년’
DB그룹은 1997년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DB하이텍을 설립했고, 2007년 동부제철의 당진공장을 세우며 제조업 기반을 닦았다. 공교롭게도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사업에 투자했던 두 시기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채권단과 투자자들의 자금 회수 압박에 DB그룹은 2014년부터 동부고속·제철·건설·팜한농·대우전자 등 주요 계열사들을 매각했다. 그룹은 금융계열사 위주로 재편됐으며 올해 기준 재계 39위로 하락했다.
그룹은 2017년 새 출발을 위해 사명을 ‘DB’로 바꿨지만 다시 구설에 올랐다. 김준기 전 회장이 그해 9월 여비서 성추행 논란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후 가사도우미 성폭행 혐의가 추가돼 작년 10월 구속 기소됐다. 김 전 회장은 지난 4월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그룹은 이미지 타격으로 몸살을 앓았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그룹이 위기를 맞은 건 김준기 전 회장이 경제 흐름을 잘못 타 무모하게 투자했기 때문”이라며 “김남호 회장은 일찍부터 경영에 뛰어들었지만 구조조정을 하느라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제야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고 했다.
2010년대 중반 재정 위기로 구조조정을 겪었던 DB그룹이 김준기 전 회장의 성폭행 파문으로 다시 오너 리스크에 휩싸이게 됐다. 2019년 10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체포된 김준기 전 회장. 사진=연합뉴스
김남호 회장에게 주어진 과제는 가장 먼저 내실 다지기가 꼽힌다. DB그룹은 금융계열사들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하지만 업황이 좋지 않다. DB손해보험의 별도 매출은 2017년 15조 743억 원에서 2019년 16조 657억 원으로 늘었지만, 순이익은 6221억 원에서 3727억 원으로 줄었다. DB생명보험의 경우 매출이 2017년 2조 3781억 원에서 2019년 2조 2605억 원, 순이익은 292억 원에서 189억 원으로 줄었다.
#경계 허무는 금융 ‘1위 사수 힘드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DB손해보험은 운전자보험 전통 강자로 1위를 유지하며 잘 운영되고 있다”면서도 “손보업계 전체가 초저금리로 운용자산이익률이 하락하면서 역마진이 확대됐으며 정비수가 인상과 의료이용량 증가로 실손·자동차보험 손해율은 오르는데 감독당국 통제로 보험료 인상은 어려워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서지용 상명대 교수는 “생보도 대면판매 위주로 설계사 등 사업비가 많이 들고 경기 침체에 따른 종신보험 가입률 하락으로 마진이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IT·핀테크 업체가 온라인 플랫폼 영향력과 편리성으로 금융업 경계를 허물면서 고객들을 흡수하고 있다. DB그룹은 다른 종합금융사들과 달리 제1금융업이 없고 보험 위주 사업 구조여서 경쟁력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주근 대표는 “인구가 줄고 자동차 시장이 소유가 아닌 공유와 사용 개념으로 바뀌면서 보험 필요성이 줄고 있어 성장성이 높지 않다”고 했다.
종합 금융사로서 살아남으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서지용 교수는 “온라인 서비스와 플랫폼 확대로 설계사 등 채널 비용을 절감해야 하며 생보를 줄이고 손보를 강화하면 이익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저금리 기조로 펀드상품 수요가 늘어난 점에서 금융투자 비중을 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금융업 성장이 정체됐기에 제조 계열사를 중심으로 새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이유로 김남호 회장이 DB하이텍에 주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DB하이텍은 2014년부터 영업이익 기준 흑자 전환해 2017년 1432억 원, 2019년 1813억 원으로 규모가 늘었다. 사물인터넷(IoT) 등 4차산업 발달로 아날로그 반도체 수요가 늘어 중국 팰립스 업체들의 8인치 웨이퍼 수주가 증가한 덕분이다.
그러나 8인치 웨이퍼는 반도체 주력 분야가 아니기에 시장을 주도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DB하이텍이 꾸준히 이익을 낼 알짜 계열사이긴 하지만 그룹 미래를 맡길 사업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박주근 대표는 “파운드리와 설계 모두 하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과 달리 (DB하이텍은) 제조업만 하고 있어 큰 경쟁력이 없다”며 “구조조정으로 실탄을 확보하고, 뚜렷한 그룹 비전과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것이 과제”라고 했다. 이어 “그룹은 아직 아버지 그늘에서 못 벗어나 있다. 인력 체계 개편이 가장 우선”이라며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을 외부에서 영입한 것처럼 처음에는 외부 수혈을 통한 충격요법을 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